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3일

독일과 소련 불가침조약 (Nazi-Soviet Non-Aggression Treaty) 조인

산풀내음 2017. 7. 16. 05:47

19398 23,

독일과 소련 불가침조약 (Nazi-Soviet Non-Aggression Treaty) 조인

 

1939 8 23일 오전 10, 모스코바에서 스탈린이 입회한 가운데 독일 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상 몰로토프간에 기한 10년의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됐다. 양국은 또 폴란드 분할에도 합의했다. 9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전이었다.

 

Stalin supervising the signing of the so-called Molotov-Ribbentrop Pact dividing Europe between Hitler's regime and his own, Aug 23, 1939. Standing L-R: Ribbentrop, Stalin, Pavlov, Gaus. Sitting: Molotov

 

공산주의를 증오한 나치 독일히틀러는 독일에서 집권하자마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여 강제로 해산시키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불태우는 등 자국 내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들을 탄압했고 소비에트 연방나치 독일을 소비에트 연방을 크게 위협하는 나치즘 세력으로 생각하여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의외의 사실이었다.

 

독일과 소련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이면에는 당시의 국제 정세가 큰 몫을 하였다. 아리아민족의 우월성을 제창하며 대독일 건설을 부르짖던 히틀러는1936 1차 대전의 결과 비무장지대로 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의 위반이었으나 원래 독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이 1938 3월 불법적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역시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에 나뉘어진 게르만인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후 히틀러는 이웃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인 주민이 다수인 주데텐란트를 내놓으라고 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1938 9 30일 독일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협정을 체결하여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하였다.

 

더 나아가 독일은 1939 3월 히틀러는 폴란드에 단치히 지역 양도를 요구했다. 이렇듯 히틀러의 영토적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과의 협조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영국 챔벌렌인 수상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했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비해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소련과 함께 3국 군사동맹 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발트해 3국의 할양문제를 영국이 거절하면서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렇게 일이 틀어지자 히틀러가 소련에 접근했다.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전한 뒤 빼앗겼던 단치히 지방의 반환을 명분으로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스탈린 또한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상실했던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 독재자는 의기투합 할 수 있었다.

 

8 16일 몰로토프 외상은 1.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2. 독일이 일소관계 개선에 노력 3. 발트해 제국의 공동보장 등의 내용을 독일에 제안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 시 자칫하면 소련과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될 것에 대비, 몰로토프의 제안을 수락했다. 20일에 독소통상차관협정이 체결됐고 23일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됐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은 채 2년이 가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1941 6 1, 독일군이 소련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불가침 조약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독일에게 소련의 광활한 곡창지대와 유전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선 매력적인 먹이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