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3일

중공군, 금문도에 대한 대규모 폭격

산풀내음 2017. 7. 16. 05:50

19588 23,

중공군, 금문도에 대한 대규모 폭격

 

https://www.youtube.com/watch?v=EVSYZHFaX44&t=102s

 

1958 8 23일 이른바 `금문도 위기` 또는 진먼 포격전으로 불렸던 금문도(金門島, 진먼다오)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됐다. 이날부터 47일간 계속된 이 공격에 중국은 47 4천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포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2시간 동안 무려 5 7천 발의 포탄이 날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이 금문도를 손에 넣지 못했다. 훗날 공개된 미국 극비문서에 의하면 미국이 이 당시 핵폭탄 투하를 검토한 할 정도로 포격전은 치열했다. 영어로는 Second Taiwan Strait Crisis 또는 1958 Taiwan Strait Crisis라고 한다.

 

 

 

 

먼저 금문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기 위해 지리적 특성을 살펴 보면, 금문도는 대만으로부터 2km, 중국 복건성 하문(샤먼)으로부터 불과 1.8.km 떨어져 있다. 따라서 금문도는 중국의 위협에서 대만을 지키는 방파제이자 본토수복의 최전진 기지다. 대한민국의 서해5도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길이 20km, 남북길이 5~10km인 금문도의 면적은 132만㎢로 강화도의 절반 크기이다. 소금문도, 대금문도 등 10여 개 섬을 포함해 금문도로 불리는 이 지역은 옛날 해적과 밀무역의 근거지였다. 명나라가 망한 후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내걸고 이곳에서 거병했으나 실패, 대만으로 후퇴한 역사를 갖고 있다.

 

잠깐 국공내전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1946년부터 시작된 2차 국공내전에서 특히 1948년 중반부터 중공군의 역습에 국민당군이 밀리기 시작하고 이른바 3대 전투인 회해전투, 평진전투, 서주회전에서 연전연패를 당하였다. 중공군은 1949 1 4일에 천진, 31일에 북경에 입성하였고, 파죽지세로 양쯔강을 건너 4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을 함락했으며 5 27일에는 중국 최대 도시 상해까지 함락시켰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중공군의 맹공에 국민당군은 도처에서 패배 당하고 연안일대가 중공군 산하로 들어가면서 국민당군의 최후 거점이 된 대만의 함락도 이제는 초읽기에 들어서게 된 상황이었다. 7월부터 중공군은 대만 상륙작전을 결정하고 그 임무를 엽비의 제 3야전군에 맡겼다.

 

한편, 국민당군에게 있어 금문도의 전략적 가치가 점차 부각되어 1949 6월부터 병력과 화기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1949 10 1일 모택동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고, 10 15일 광주에 이어 10 17일 하문까지 중공군이 함락시키면서 금문은 대만 방어의 중심축으로 부각되었고 반대로 중공 입장에서는 반드시 함락시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중공군은 그 동안의 포격을 중단하고 10 24일 오후 8시경부터 도하를 개시하였다. 3일간의 치열한 금문도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27일까지의 전투에서 상륙한 1만의 중공군을 국민당군 4만이 전멸시켜 중공군은 상륙부대 중 단 한 명도 육지로 돌아온 자가 없는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는 국공내전 기간 중 국민당군이 처음으로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대만을 국민당의 최후 보루지로서 지켜낸 것이었다.

 

1950하이난 섬(海南島) 전투(1950.3.5 - 4.30) 홍콩 근해의 완샨군도(萬山群島) 전투 (1950.5.25 - 6.27)에서 중화민국 국군중국 인민해방군에 잇따라 패퇴하고, 근해의 저우산(舟山)군도(1950.5.16)와 다천(大陳)(1955.2.11)에서 중화민국 국군이 철수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현재와 같은 경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정전협정 체결로 마무리되었고 한편 1958 7월에 이라크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왕정이 전복되었고, 영ㆍ미 양국 정부는 즉시 레바논과 요르단에 파병하여 중동지역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이었다. 중국은 중동 인민의 반침략주의 전쟁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타이완 해협의 연안 병력을 확충하고 중화민국 지배하에 있는 연안의 금문도(진먼섬) 마쭈 열도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중화민국 측도 이에 맞서 8 15일에 진마 지구(金馬地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다.

 

1958 8월 23 오후 6, 중국 인민해방군은 금문도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만발, 하루 만에 57천 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 치열한 포격전은 47일간 지속되었지만, 중화민국은 미국 해군의 해상수송 지원을 받으며 금문도를 사수하고 8인치 유탄포로 하문(샤먼)시의 중공군에 반격을 가했다. 그 후, 공격의 횟수가 점차 줄어들다가 1979 1월 1 ·중 국교 정상화 이후 포격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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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으로 이곳에 상륙하려던 한국일보 최병우 기자가 9 26일 이곳에서 순직했다. 이날의 폭격은 1949년 공산화 이후 이곳에 대한 중국의 여섯 차례 대규모 공격 중 가장 치열한 것이다.

 

 

 

 

The Quemoy Bombardment(진먼포격). In just two days Communist guns fired over 75,000 rounds against the Quem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