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3일

실미도 특수부대원 사건 발발

산풀내음 2017. 7. 16. 06:14

19718 23,

실미도 특수부대원 사건 발발

 

1968 4월에 창설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684부대’라고 하지만 정식 명칭은 2325부대 209 파견대였다. 1968 1월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1.21사태가 창설 계기였다. 분노한 박정희는 보복조치로 특수부대 창설을 명령했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명을 따라 대한민국 공군 산하에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인원은 남파 무장공비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했고, 인천에서 20km 떨어진 실미도가 훈련장소였다. 훈련은 가혹했다. 외딴 섬 실미도에서 이들이 보낸 34개월은 인권유린과 잔악행위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 곳엔 인간은 없고 평양에 침투해김일성의 목을 따오는목적만 존재했다. 가혹한 훈련 과정에서 7명의 훈련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훈련 도중에 심장마비로, 섬에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명령을 듣지 않았다고, 근처 민가에서 강간을 저지르다가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실미도 부대원들

당시 부대 교관들

 

그러나 실전명령만 기다리며 묵묵히 참아온 3개월간의 훈련이 끝나도 작전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급과 지원도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옥 같은 훈련을 3년이나 더 받으며 침투명령만 기다렸다. 그사이 중앙정보부장은 김계원을 거쳐 이후락으로 바뀌었고 남북 대치국면도 화해분위기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덧 실미도 특수부대의 존재가치도 사라졌다. 684부대는 버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에 대한 대우도 갈수록 나빠졌다.

 

1971 823일 새벽6, 실미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최초 31명 중 남아 있는 24명의 특수부대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가혹한 훈련과 끝없는 기다림 끝에 불만이 고조되어 교육대장 외 교관, 기간병 등을 살해하였다.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원 1명도 사살되었다.

 

남은 23명의 특수부대원들은 34개월 만에 실미도를 빠져 나와 12 20분경 인천 옥련동 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시내버스를 탈취한 뒤 최종 목적지인 청화대로 향하였다.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이 있었고 총격전에서 저지하려던 병사 2명이 부상을 당하였고 탈출한 부대원 2명은 사살되었으며 버스 타이어가 터져 더 이상 이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향해 가던 중 14 15분경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육군 포위망에 잡혀 가로수를 박고 정지했으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이 벌어졌고 결국 수류탄을 터뜨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15명이 현장에서 죽었고 6명이 체포됐으나 이들 중 2명은 병원에서 죽고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 3 10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남북대치가 첨예했던 1970년대의 자화상이었다.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시신을 꺼내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하였고, 이후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진 채 30여 년간 묻혀 있었다. 당시 보도를 살펴보면 사건 발생 당일 오후 3 10분 대간첩대책본부는 “무장 공비 21명의 서울 진입을 저지했다고 발표했고, 세 시간 뒤, 정래혁 국방장관은 사건을 일으킨 괴한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라공군 관리하에 있던 특수범 23명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무장난동을 벌였다고 정정발표 했다.

 

그러다 1999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 말 같은 이름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영화에서 실미도의 부대원들은 사형수, 조폭 등 흉악범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미도 훈련병들의 유족에 따르면, 이들은 높은 보수를 준다는 정보기관원들의 거짓 약속에 속았을 뿐 평범한 시민들도 실미도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훈련병 8명의 유족 47명이 강우석 감독과 제작사를 상대로 사자(死者) 명예훼손 및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공군 감찰부장 김중권(이후 판사를 거쳐 국회의원을 지냄) 2004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범죄자 출신의 부대원은 없었고 시골의 농민이나 일용직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