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4일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침몰사건

산풀내음 2017. 7. 16. 19:03

19458 24,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침몰사건

 

 

https://www.youtube.com/watch?v=YOd5gteYhvM&t=40s

 

 

일본이 항복을 발표한지 7일 후인 1945 8 22일 오전 10시 경, 일본 해군의 군수 수송선 우키시마호는 조선인을 태우고 일본 북동부의 아오모리 오미나토 을 출항해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24일 갑자기 인근 항구로 회항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연합군이 1945 824일 오후 6시 이후 100톤 이상 대형 선박에 대한 운항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회항하여 일본 교토의 군항 마이즈루(舞鶴)를 들어서던 우키시마호가 24일 오후 5시경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두 동강 나면서 서서히 바다로 사라졌다. 육지를 불과 500M 남겨 두고. 1주일 후 일본 해군은 사고 경위에 대해 “조선인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미군이 투하한 기뢰를 건드려 침몰했다”고 짧게 발표했다.

 

공식적 발표 및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우키시마호(4,730t)에는 조선인 피징용자 3,725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5명 타고 있었고, 그 중 조선인 524명과 일본 해군 25명 등 549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사고현장 목격자와 생존자들의 증언은 이와 너무나도 판이하다. 우선 일본측은 애초부터 탑승자 명부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그냥 무턱대고 강압적으로 조선인들을 승선시킨 것이었다. 노사와 다다오(野澤忠雄) 당시 기관장은 “무조건 태우라는 명령에 따라 마구 채워 넣었다”고 NHK에 털어놨다.

 

이 때문에 정원이 841명인 우키시마호에는 갑판과 선실, 선창할 것 없이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배가 기울 정도로 많은 한국인이 탑승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승선한 조선인은 7500에서 8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면 이 중 5000명 이상이 수장된 것이다.

 

일본 해군성은 8 18일 느닷없이 우키시마호에 “즉각 현지 조선인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관련 일본측는 “조선인 해군 군속들이 고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호소하는 등 불온한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패전 직후인 상황을 고려할 때 조선인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군함을 움직였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것에 더하여 어려가지 정황이 일본의 의도적으로 배를 폭파해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첫째, 돌발적인 출항명령에 당시 승무원들은 항명했지만 강행하였고, 함장 포함 승무원 중 누구도 부산까지 항해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항해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산까지 인도할 해도도 없었고 더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기초적인 연료조차 제대로 보급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목적지가 부산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어느 바다 중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번째는 무리하여 승선인원을 넘긴 것이다. 정원이 841명인데 이보다 최소 4.8(일본 측 발표)에서 최대 9배까지 정원을 늘린 것은 이미 폭파와 관계 없이 수장이 예견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사고선박이 4,730t이나 되는 큰 군함으로 대규모 폭발이 아니고서는 짧은 시간에 침몰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을 3-4회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이는 기뢰가 아니라 내부의 폭발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또한 이 배에는 출항 전부터 다량의 무기와 화약류가 실려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나중에 일부 인양된 선체에서 내부 철골이 밖으로 향하고 있었고 기관실마저 파괴됐다는 것을 들어 강력한 폭발이 내부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게다가 우키시마호는 입항 전 마이즈루 군항 측으로부터 소해(掃海) 작업이 완료됐다는 통보와 함께 입항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 좀 더 일본의 불순한 의도를 알 수 있는 증언들이 있다. 사건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남긴 생존자 채길영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해군들은 탑승한 한국인들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도록 했고 그 사이에 일본 승조원들은 우키시마호의 소함을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생존자 강이순 씨 역시 당시 배에 있던 일본 해군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고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일본 해군들이 기관실로 몰려갔다고 증언했다.

 

하루 빨리 조국에 돌려보내 주기 위해 그렇게 서둘러 부산으로 운항을 재촉하던 것과 달리 사고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는 선채 인양에는 5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한국전쟁의 돌발로 인해 우키시마호를 인양해 고철로 팔기 위한 것이었다. 1950 3월과 1954 1월 두 차례 인양되었지만, 선체 ‘재활용’을 위해 인양에 나섰던 업체가 뒷부분만을 끌어올린 후 손을 들면서 인양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1992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하여 2001 8월 23,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받았지만 2003,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받았다. 아직까지 이 사건의 진상조사나 일본 정부의 사과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한국 정부 또한 외면하고 있다.

 

 

 

 

 

 

침몰하고 있는 우키시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