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4일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수사 발표

산풀내음 2017. 7. 16. 19:07

19688 24,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수사 발표

 

1968 7 20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기자들을 불러 남한 최대의 간첩단 사건, 이른바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말을 담은 발표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관련자 118. 정태묵, 최영도, 윤상수 등 거물급만 27명으로1961년부터 임자도를 중심으로 서해안과 전라남도 일대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결정적 시기에 대비한 유격활동과 근거지 구축을 기도하며 서울과 목포를 비롯한 각지에서 위장기업을 운영하면서 각계각층에 대거 침투했다. (경향신문 1968 720일자)

 

그리고 1968 8 24일 오전 중앙정보부가 일명 `통일혁명당 간첩단사건`의 진상을 발표, 이 사건 관련자 158명 중 73명을 송치하고 나머지 85명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임자도 간첩단 사건은 정태묵과 최영도 등이 주동이 되어 전라도 지역에 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중 아편쟁이였던 정태묵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에 밀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통혁당 중앙당의 존재가 알려졌고, 그 중심인물이 김종태 였다.

 

정태묵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보성전문(고려대) 중퇴, 김일성대학과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남로당 정치공작대장으로 활동했으며 6·25때는 임자로 오지 않고 목포와 도당 등지에서 주로 활동을 펼치다 1952년 영광 불갑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시작, 1953년 지리산에서 군·경에 체포돼 1960년까지 7년 간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칩거하던 중 북한에서 교육받은 동생 정모 씨의 안내로 월북해 교육받은 후 활동을 재개했다.

전남조직의 책임자로 돼 있는 임자면장 출신 최영도는 1945년 인민위원회 결성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에서 교육받고 내려온 조카 김수영를 매개로 하여 본격적 활동을 시작해 1964년 통혁당 창당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후 정태묵은 비합법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남의 도당에 해당하는 조직을 만들려는 전망 하에서 과거 같이 활동했던 남로당 전향자들 및 농민운동 쪽을 중심으로 조직사업을 전개했으며 지금의 무안동 국제서점 자리에 '동성서점'을 운영하면서 지역 청년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정태묵의 동생은 '무안 정부대여양곡 횡령사건'으로 관계자 7명과 함께 서울에 도피 중에 있었으며 임자도 시절부터 아편에 중독돼 있었다. 그는 자수하는 과정에서 형 정태묵을 밀고하게 되었고 결국 정태묵은 1972 728 53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듯 임자도 간첩단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와 달리 3년간 치밀한 수사의 결과물이 아니라 횡령 사건 수사 중 우연히 나온 결과물이고 이후 증언에서도 나타나듯이 상당 부분 확대 및 조작된 부분이 있는 사건이었다.

 

정태묵의 검거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김종태는 전남지역 통혁당의 지도자급이며 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최영도의 친구이자 포항 동지상고 교사 출신으로 일제 때부터 사회 운동에 발을 들이고 있었고, 4,19 이후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확신으로 지하 정당 운동을 나서게 된다.

 

이들 간첩단은 김종태를 우두머리로 하고 김질락(`청맥`사 주간)과 이문규(학사주점 대표)를 중심으로 서울 문리대를 비롯한 각 대학 출신 혁신적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모급은 전후 4차에 걸쳐 북한을 내왕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한 바 있고 북한 대남사업 총국장인 허봉학으로부터 지령과 미화 7만 달러, 한화 2350만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수령, 가칭 통일혁명당을 결성,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각계각층에 침투조직을 확대해왔다.

 

중앙정보부는 이 간첩단이 모택동 공작전법 베트콩식 게릴라 전법 등을 원용, 민족해방전선 조국해방전선을 구성, `학사주점` 9개의 서클을 형성, 각종 정보를 수집, 북한에 제공해 왔다고 밝혔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검거된 자는 모두 158명이었으며, 이들 중 73명이 송치되었고, 23명은 불구속되었다. 무장공작선 1, 고무보트 1, 무전기 7, 기관단총 12, 수류탄 7, 무반동총 1정과 권총 7정 및 실탄 140, 12.7mm 고사총 1, 중기관총 1, 레이더 1대와 라디오 수신기 6, 미화 3만여 달러와 한화 73만여 원 등이 압수되었다.

 

이들 간첩단은 1969 1 25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상의 간첩죄, 내란 음모죄 등을 적용,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 5명은 사형, 신광현 등 4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21명은 최고 15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김종태가 사형을 당하자 김일성은 그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해주사범학교를 김종태사범학교로 개칭하였다.

 

암울한 시절 정치권력은 국민의 눈을 막고 비판세력의 씨를 말리기 위해 많은 시국 조작사건을 만들었지만, 통혁당 사건은 사건이 조작됐다는 일부 주장과 달리 실재했던 사건이다. 당시 통혁당 경남도당위원장을 역임했던 신광현은 "통혁당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주도로 엄연히 실재했던 사건이다. 다만 임자도 사건은 통혁당과 연계성은 있으나 별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형을 발고해 죽게 한 정씨는 죽을 때 나는 죽어서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말아라. 지나가는 사람마다 무덤을 밟고 지나가게 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68 1128일 열린 ‘통일혁명당 사건’ 공판에서 주모자로 기소된 김종태(왼쪽)가 진술을 하고 있다.

통혁당 사건 당시 재판을 받는 신영복(왼쪽). 신영복은 육사교관(육군중위) 신분이어서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이후 사상전향서를 제출하여 1988년 출소하였다. 그러나 월간 ''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영복은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혁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