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4일

한국과 중국 국교 수립

산풀내음 2017. 7. 16. 19:11

19928 24,

한국과 중국 국교 수립

 

1992 824,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은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부장과 양국 정부를 대표해 수교협정 서명식을 갖고 상호 국가승인, 외교관계 수립 등 6개항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과 중국은 지난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사실상 82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게 됐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으로 두 나라가 총부리를 겨눈 이후 42년 만에 공식적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한 것이다. 신문은 중국 국영 CCTV가 서명 장면을 생방송으로 중계한 사실과 이상옥 장관이 양상쿤(楊尙昆) 당시 국가주석, 리펑(李鵬) 총리 등 중국 지도부를 예방한 소식을 상세하게, 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전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도 변화는 1980년대에 들어와 감지되기 시작되었지만, 결정적 계기는 1983 5월의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었다. 사건 해결 후 서로 외교 관계가 없던 양국이 1983 8,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은 체육·문화·관광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양국이 교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 명에 가까운 한민족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1989 12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수교 당시 중국 측은 하나의 중국원칙을 들이대며 대만과의 단교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외교에서 최우선 원칙으로 대한민국에게만 요구한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도 1979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진행됨에 따라 대만은 한국 측에 중국과의 수교 여부 및 향후 대만과의 단교 여부를 문의하였고 정부는 대만과의 관계는 계속될 것이라고 하였지만, 국교 수교 1주일 전이 8 15일에 한국은 중화민국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중화민국과의 단교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중화민국측은 이를 즉각 언론에 공개했으며 대만 여론은 격분했다. 그리고 8 21일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단교 문서를 전달했고, 그리고 중국과 수교를 맺은 24, 중화민국 대사관에 72시간 내에 국기와 현판을 내리고 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 중화민국 대사관은 6시간 만에 국기 하강식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1992 8 24일 한.중 수교로 철수하게된 서울 명동 대만대사관의 직원들이 대만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리고 있다.

국기 하강식을 지켜보는 대만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