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8월/8월 28일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산풀내음 2017. 7. 21. 09:48

19638 28,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1955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1955 12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흑인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시 경찰서에 체포,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펼쳐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다른 흑인 및 양심적인 백인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여 5만의 시민이 동참했다. 흑인 해방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56 12에는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판결을 얻어낸다.

 

이후 유사한 운동들이 남부 도시 곳곳에서 빈발했다. 흑인 지도자에 대한 구속과 시위금지령이 한층 강화되고 흑인들도 더욱 호전적으로 변하면서 1963년 들어서만 10주 동안 186개 지역에서 750회 이상의 시위가 일어났다.

 

1963 8 28,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 100주년을 맞아 시민 25만 명이 워싱턴기념탑 광장에 모였다. 참석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1514대의 임대버스와 21편의 특별열차가 동원됐고, 남부의 가난한 흑인들은 대표를 보냈다. 오전 1115, 1.6km 앞의 링컨기념관을 향한 참가자들의 대행진이 시작됐다. 참석자들 손에는 ‘인종차별 철폐’ ‘일과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랠프 번치,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 가수 밥 딜런 등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윽고 행진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마틴 루터 킹이 링컨기념관 앞에 섰다. 그리고 저 유명한 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토해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투쟁하는지 그의 미래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그의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특히 그의 연설 중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라는 부분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의 건국정신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년 뒤인 1964년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과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통과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지만, 루터 킹은 이날 행진이 있은 지 5년 뒤인 1968 4 4일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피살됐다. 그리고 킹의 죽음에 분노한 흑인들은 미 전역 168개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켜 46명이 사망하고 21,000여명이나 부상했다. 불이 난 곳도 2,600여 곳이나 됐다.

 

그러나 킹 목사는 그의 명성과는 달리 창녀들과의 Sex party, 유부녀와의 불륜 등 여러 Sex Scandal에 휩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