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는 역사이야기/역사 한눈에

중동 전쟁

산풀내음 2018. 4. 8. 15:20

중동 전쟁 (Arab-Israeli War, Middle Eastern Conflict)

 

팔레스타인은 원래 현재의 이스라엘을 비롯해 레바논·요르단·시리아 등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이 지역에 독립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패망 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도는 유랑 민족으로 전락했다.

 

반면 아랍인들은 636년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본격 지배했다.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 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구시가지는 유대교뿐 아니라 이슬람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1948년에 시작됐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독립국가를 세웠기 때문이지만 사실 이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이라는 역사가 깔려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 승리를 위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독립국가를 건립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인시오니즘을 지지했다. 동시에 독일과 동맹 관계였던 오스만투르크의 후방 교란을 위해 아랍인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양측에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랍 측에는 1915맥마흔 선언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는 2년 후밸푸어 선언을 통해 이중 약속을 한 것이다.

 

이후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게 됐다. 결국 유엔은 1947 11 29일 제181결의안(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81, Partition Plan)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식민지를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안건을 제시한다. 전체를 3개로 분할하여 야파 지역을 아랍인에게 주도록 하고, 베들레헴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지역은 유엔이 관할하는 공동 구역으로 결정한 이 결의안을 대부분의 주류 유대인들은 환영하였으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과 주변 아랍국가는 반대했다.

 

아랍 측은 전체 인구의 40%에 못 미치는 유대인이 58%의 영역을 할당 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나 할당된 지역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야파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갈릴래아 지역 중 야파와 요르단이 아랍 지역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에 배정된 지역 절반 정도는 네게브 사막(광야)였기에 아랍의 주장도 부당한 면이 있었다.

 


환호하는 이스라엘 국민들




1)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건국에 아랍권 공습

 

1948 5 14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텔아비브의 한 건물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다음 날인 5 15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1948 Arab-Israeli War, First Arab-Israeli War, Israeli War of Independence, 1948.5.15-1949.3.10)을 개시한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 동안 결성된 성전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초기 양측을 전력을 살펴보면,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대로 지급해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이후 이스라엘 총리가 됨)의 유명한 말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주요 도시인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잘 지켜 냈고, 이후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등을 맹폭격하면서 승리를 거뒀다. 결국 양측은 1949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집트와는 2 24, 레바논과는 3 23, 요르단과는 4 3, 그리고 시리아와는 7 20일에 각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당초 유엔의 분할안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됐다. 이 전쟁을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의 무기체계를 보면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Avia S-199 Israeli 1st fighter aircraft

 

전쟁의 실상을 살펴보면 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전쟁의 명분과 대의에서 차이가 많았다. 아랍 군대들이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하여,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다는 신화는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는 아랍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조차 않았다. 1948년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이 철수할 즈음에 유엔 결의가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자국의 국경들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다음으로 전쟁 수행 능력에서 살펴보자. 표면적으로는 전쟁 초기 이스라엘군과 아랍연맹군의 전력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이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었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막대한 외교적,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대로 아랍인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영국 위임 통치 시절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오직 팔레스타인 게릴라들뿐이었다. 영국 위임 통치 당국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무력화시킨 반면, 시오니스트 게릴라 조직들에게는 잘 무장하고 훈련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즉 목숨으로 걸고 싸움에 임할 각오를 가진 유일한 아랍계 세력인 팔레스타인에는 싸울 수 있는 전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회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 10 1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물론이고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 정부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승인을 거부하였다.

 

 

2)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 운하 둘러싼 충돌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 정부의 재정적 지원 하에 1896년 개통되었다. 그런데 수에즈운하 건설 당시에는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던 영국은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에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과의 중요한 해상 연결로라는 점에서 수에즈의 전략적 가치에 대하여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875년 영국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 수상은 이 회사의 이집트 지분을 구매하여 당시 대부분 프랑스 개인 투자자들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의 부분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882년 이집트의 분쟁에 개입한 영국은 운하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을 획득하여 운하의 운영, 수익 등에 있어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은 운하가 영국 보호 하에 중립지역임을 선언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전시와 평시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국가의 선박이 운하를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음에 동의하였다.

 

Benjamin Disraeli and Suez

 

이집트에서는1952 7 23일 나세르(Gamal Abdel Nasser Hussein, 1918-1970)와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몰아내고 제1차 중동전쟁의 영웅인 하마드 나기브 장군을 대통령에 내세운다. 쿠데타 정권은 나일강에 아스완 댐 건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서구사회의 경제지원을 이끌어 내는 한편, 소련과 무기구입 협정을 체결하여 군사력 현대화도 추진하였다. 마침 당시 아랍세계를 휩쓸던 민족주의의 열기는 이집트도 비껴가지 않았다. 나세르는 1954 10, 그때까지도 수에즈 운하지역에 주둔하던 영국군 철수에 대한 협상을 이끌어 내면서 1956 6월 13 잔존해 있던 영국군을 철수시켰다.

 

자유장교단은 무하마드 나기브를 대통령직에서 박탈시킨 뒤, 가말 압델 나세르를 지도자로 내세웠다. 나세르는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국가원수로 활동한 뒤, 1956 6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23일 제2대 대통령에 공식 취임 후 업무를 시작하였다.

 

Gamal Abdel Nasser Hussein

 

그런데 당시 미소를 양축으로 첨예하게 진행되던 냉전구도 속에서 이집트는 경제적, 군사적으로는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실리외교를 펼치고 있었지만, 이것이 미국의 눈 밖에 나는 이유가 되었다.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통해 이집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빌미 삼아 아스완댐 건설을 위한 2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취소시겼다. 궁지에 몰린 나세르는 댐 건설을 위한 건설 재원 확보 등을 이유로 1956 7 26,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는 전격 선언을 하게 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잇는 중요한 국제수로였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선언은 운하에 대한 이권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사실상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의 소유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행사하고 있던 조차권도 아직 12년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 당하는데 크게 격분하여 동맹에 참가하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약속 받은 이스라엘은 1956 10 29, 시나이 반도를 기습 공격하여 주요 요충지들을 장악한다. 2차 중동전쟁(The 1965 War, The 1956 Suez War)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도 공군기들을 동원하여 이집트군의 주요 공군 기지들을 공격하는 한편 공수부대를 투입,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다. 그런데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우려해 두 나라의 군사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소련 또한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략행위에 대해 대륙간 탄도탄 공격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냉전의 양 축이 모두 압력을 가해오자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은 전쟁을 일으킨 지 9일 만인 11 6, UN이 중재한 휴전에 합의하게 된다. 11 23일 정전이 성립되었으며, 영국-프랑스-이스라엘군의 즉각 철수를 UN총회에서 결의함에 따라 12월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이듬해 3월에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고 있던 이집트 영토에서 철군 했다.

 




British carriers during Suez Crisis 1956

 

2차 중동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영국-프랑스-이스라엘군의 일방적 승리였지만, 이들 3개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스라엘은 아카바만의 봉쇄를 푸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 전쟁은 또한 미국과 소련에게는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편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가 더 거세지는 결과를 낳았다. 불타오른 아랍 민족주의는 1964 1, 아랍정상회의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3)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영토 3.5배 늘려

 

제2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둔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 차게 전쟁준비에 나선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 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다.

 

3차 중동전(Third Arab-Israeli War, 1967 Arab-Israeli War, Six-Day War)의 원초적 동기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빈번한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시리아의 바아스당은 가장 강력한 반유대주의 및 반서구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바아스당의 실권을 장악한 아민 하페즈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취하였다.

 

1966 10월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은 시리아는 대이스라엘 강경책을 더욱 촉진시키게 되었다. 당시 시리아-이스라엘 간에는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여 대 시리아 감정을 격발시켰다. 이것이 이스라엘-시리아간의 무력충돌을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리아요르단은 이집트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고 나세르는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한다면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천명하게 된다. 나세르는 요르단 및 이란과 동맹관계를 맺어 대 이스라엘전에 대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측에 미리 포착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1967 5 29일에 전시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1967 6 5일 새벽,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스라엘 공군은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폭격을 가했다.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여대의 항공기 중 300여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한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의 비행기 손실은 19대 밖에 되지 않았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된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이집트는 아랍국가들의 맹주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의 주대상은 이집트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수에즈운하까지 진주하였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이집트의 군장비가 거의 파괴되어 전쟁 시작 4일만에 UN의 정전 권고를 수락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시리아는 제3차 중동 전쟁의 기본 동기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전과 동시에 대 이스라엘전에서 적극성을 띠지 않았으며 이집트와의 협조체제도 미약했다.

 





A truck full of captured Egyptian soldiers cross a convoy of Israeli troops near El Arish, Egypt, during the the Six-Day War, June 8, 1967.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시리아와 접경 지대인 골란 고원까지 손에 넣었다. 예전의 영토보다 3.5배나 되는 땅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유엔은 정전을 촉구했고 결국 6 9일 전쟁이 중단됐다.

 

 

 

 

4)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 75만 이집트군 총공격

 

이스라엘에 당한 3차에 걸친 치욕적인 패배는 주변 아랍국의 정상들에게 아랍 민족으로서 최소한의 긍지라도 찾아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무감을 부여했다. 특히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통째로 빼앗기고 바로 코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치해야 했다. 이집트 국민들에게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이 구축한 최신 바레브 요새에서 나부끼는 이스라엘 깃발은 한 마디로치욕의 상징이었다. 전쟁 패배 두 달 후인 1967 8월 수단에서 열린 아랍정상회의에서아랍의 3가지 No’원칙이 발표되었다. ‘이스라엘과는 강화하지도 않고, 교섭하지도 않고, 승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국은 1970년 미국 주도의 중동 평화협상을 제기했고 여기에 요르단과 이집트가 화답하면서 평화의 물꼬가 트여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중동전쟁으로 향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PLO 내 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은 이에 항의해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해 이집트와 요르단 사막에서 폭파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도 자국 내에 있던 PLO 조직의 소탕작전을 선포했고, 이후 요르단은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0 PLO 산하에 과격 테러단체인검은 9월단이 조직된다. 이 조직의 이름은 1970 11월 이집트를 방문한 요르단 총리를 카이로의 호텔에서 암살하면서 자신들을검은 9월단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후세인은 1971 PLO 조직의 완전 소탕에 성공하고 이후 PLO는 레바논으로 본부를 옮기게 된다.

 

오늘날의알 카에다처럼검은 9월단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은 1972년 서독 뮌헨 올림픽에서 있었던 선수촌 습격 사건이다. 이들은 올림픽 선수촌에 침투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사살하고 9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가 전원 사살되었고 이 광경은 전 세계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 현장은 20세기 최고의 화약고인 중동 문제를 전 세계인들에게 극적으로 각인시키는 장이 된 것이다.

 

1972년 서독 뮌헨 올림픽에서 있었던 선수촌 습격 사건

 

1971 나세르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Anwar El Sadat, 1918-1981)는 나세르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도 보였으나, 이스라엘의 무성의한 반응에 결국 전쟁을 통해 시나이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다트는 먼저 아랍간의 결속 강화에 노력하여 1971 9월에 시리아, 리비아아랍 연방 공화국을 결성하고, 1972 4월에는 요르단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PLO를 추방한 요르단과 단교하는 것으로 아랍 맹주의 지위를 강화했다.

 

Anwar El Sadat

 

1973 10월 6당일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휴일인 욤 키푸르로이스라엘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날이었다이날이집트와 시리아 연합군은 이스라엘 국방군에 대해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4번째 중동전쟁(1973 Arab-Israeli War, Yom Kippur War, Ramadan War)이 발발한 것이다.

 

Egyptian military trucks cross a bridge laid over the Suez Canal on October 7, 1973, during the Yom Kippur War/October War

 

이집트 군은 수에즈 운하에서 격렬한 포격을 실시하고 소방펌프를 이용한 창의적인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을 단숨에 돌파해서 시나이 반도로 진출, 이스라엘의 거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서 초반에 대패를 당했고, 10 8일에 있은 이스라엘 측의 반격도 대전차 미사일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이집트 군에게 격퇴되었다.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은 이스라엘의 2개 여단 및 11개 포대에 대하여 5개 사단과 188문의 야포로 공격해 나왔다. 서전에서 약 180대의 이스라엘 군 전차가 1,400대 이상의 시리아군 전차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 더해 시리아군 전차대의 장비 우수성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분투 끝에 이스라엘 군 기갑대는 골란 고원의 방어에 성공했다.

 

이스라엘군은 개전 6일만에 미국의 지원과 함께 시리아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여 시리아군을 패배 시켰다. 시라아군은 골란 고원에서 800대 이상의 전차를 잃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 뒤 시나이 반도로 전력을 이동시킨 이스라엘군은 16일 새벽 이집트군의 방어선을 뚫고,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수에즈市를 점령함으로써 초반의 패배를 만회했다.

 



Nuclear Jericho Missiles Were Ready to Be Launched in the Yom Kippur War of 1973

 

10 25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는 UN군의 긴급 파견을 결정하고 28 UN 1진이 수에즈운하에 도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은 마무리를 지었으며, 11 11일 이집트-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4차 중동전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아랍인들은 과거의 전쟁과는 다르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히려 만족하고 민족적인 긍지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여파는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 등 서방에 대해 석유 금수 조치로 석유를 무기화하는 결과를 낳아, 1년 사이 원유값이 4배나 폭등하는 등의 전세계적인 오일쇼크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계기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쟁을 위해 미국은 22억 달러 상당을 이스라엘에 지원했으며 소련은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1980년 제 5차 중동전쟁,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

 

이란과 이라크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강대국이다. 양국은 민족적·종교적으로 달라 언제든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라크가 1차 대전 전까지 500여 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2차대전이 끝난 한참 후까지도 영국의 지배를 받아와 양국이 충돌할 기회는 없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은, 수니파를 믿는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이슬람 국가를 이단시했다. 이라크도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긴 했으나 수니파가 정권을 독점해 종교적으로 이란과 갈등을 빚었다.

 

 

양국을 가르는 긴 경계선도 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 양측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곳은 국경을 흐르는 샤트 알 아랍 수로(Shatt Al Arab Waterway)였다. 수로의 경계는 늘 힘이 센 쪽에 결정권이 있었다. 1937, 양측의 합의로 수로의 경계가 동쪽(이란쪽)으로 정해졌다는 것은 그 시기의 강자가 이라크라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이라크는 1931년에 영국 지배로부터 벗어난 독립국가였으나 여전히 영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이란으로서는 감히 어쩌지 못하고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이라크로부터 완전히 철수하자 이란은 기다렸다는 듯 수로 안쪽으로 선박을 출입시켰다. 이라크는 잦은 정권교체로 정정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안으로는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해야 해야 하고 밖으로는 시리아, 요르단과 함께 대 이스라엘 공동전선을 펼쳐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해있어 이란의 도발을 제어할 여유가 없었다.

 

이란의 우세는 1975 3월의알제 협정에서 확인되었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가진 석유수출국기구 정상회담에서 이라크가 경계선을 수로 중앙으로 양보하는데 합의한 것이다. 대신 이라크는 이란으로부터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는 하나 협정 결과는 이란에 주도권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 이라크는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내정치를 안정시키는데 급급하다가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군비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 와중에 1979 1월 이란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권이 수립되면서 이란 내정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이란의 혁명정권이 군부를 대거 숙청하고 미국과의 단교로 주요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지 못하게 되면서 군사력도 약화되었다. 그런데도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수니파 지배체제를 무너뜨리도록 이라크의 시아파 교도들을 부추기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 무렵 이라크의 실권자는 사담 후세인이었다. 1979 7월에 이라크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세인은 이라크가 이란 혁명에 감염되는 것을 막고, 나아가 이란의 혼란기를 이용해 지역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1975년의알제 협정체결 시 협상을 맡았던 후세인은 그때 이라크가 당했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후세인은 선제공격으로 수로의 영유권과 페르시아만의 패권을 되찾을 생각을 했다. 그의 독재에 반감을 품은 내부 세력의 불만을 누르고 국민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전쟁은 필요했다. 인구, 국토면적, 국민총생산에서는 이란이 유리했으나 군사력에서만은 이라크가 우세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라크의 우세승이 점쳐지는 가운데 후세인은 수로의 영유권을 넘길 것, 주변 아랍국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 등 이란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1980 9 17, 먼저알제 협정폐기를 선언한 후세인은 9 22일 이란 내 주요 공군기지와 시설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 War, 1980. 9. 22. – 1988. 8. 20.)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란은 군대가 와해되거나 전투의지를 상실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의 양상은 발발 2주일 만에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바뀌어 장기 소모전으로 변했다. 11월 들어서는 거의 모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란은 정규군 외에 파스다란과 바시즈 민병대에 크게 의존하였다. 이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압도적인 전력의 이라크를 오히려 밀어붙이고 궁지에 몰아 넣었다.

 

세계 강대국들은 전쟁 초기 가급적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무기판매에만 열을 올렸으나 1984 3, 전쟁이 페르시아만 통과 유조선을 공격하는유조선 전쟁으로 비화하고서야 개입을 시작했다. 1987 4, 이란이 수년 동안 이라크를 지원해온 쿠웨이트 유조선에 공격을 가하고 미 해군이 이란을 향해 군사력 시위를 벌이는 등 전쟁의 양상이 국제전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유엔이 나섰다. 미국과 소련도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정전협상을 위해 공동노력을 펼쳤다.

 

1987 7 20일 유엔 안보리가 종전권고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수락의사를 밝힌 이라크와 달리 이란은 후세인을 전범자로 처벌할 것을 주장하며 거부했다. 이라크는 이란을 정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란을 향해 맹공격을 가했다.

 

호메이니는 결국 전황의 불리, 높은 인플레이션, 국민과 군인들의 사기저하, 미소의 압력 등을 견디지 못하고 1988 7 18일 유엔의 정전안을 수락했다. 총성은 8 20일 오전 7시를 기해 1126km에 걸친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멎었다.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와 실패만을 남긴 채 막을 내린 것이다. 양국의 독재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참으로 무모하고도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6) 현재 중동은?

 

사실상 거의 매일 포탄과 미사일로 덮여 있는 것이 중동의 현실이었다. 1-4차의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전쟁과 달리 이후에는 복잡하게 진행되었고 대표적인 전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2: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Lebanon War)

1987-1993: 1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First Intifada)

1982년 이래 2000년까지 : 2차 이스라엘-레바논 분쟁(South Lebanon conflict)

1991 : Gulf (이라크 vs. 미국 중심 다국적군)

2000~2007:  2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Second Intifada, al-Aqsa Intifada)

2003 : 이라크전 (이라크 vs. 미국과 영국 중심)

2006:  2차 이스라엘-레바논 전쟁(Lebanon War)

2008: 이스라엘-하마스 전쟁(Gaza war)

 

사우디 내 미군 주둔 등을 비난하던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국제 무장세력은 결국 2001 9·11 테러를 감행했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근거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데 이어 2003년 이라크 전쟁까지 감행했다.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알카에다 등 이슬람주의 테러 세력을 후원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조작된 명분으로 드러났다.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을 다시 성장시켰다. 이라크 내전에서 종파 분쟁을 부추기며 자신들도 성장했다. 이는 결국 IS(The Islamic State)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IS는 이라크 내 알카에다의 잔당들이었다. 이라크 주둔 미군이 병력을 보강해 반폭동 전략에 주력해 2007년을 시작으로 세력이 약화됐다. 2010년쯤에는 거의 와해 단계에 들어갔으나,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며 세력을 회복했다. IS의 전신인 이라크∙시리아이슬람국가(ISIS, The Islamic State of Iraq an Syria)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시리아 내 알카에다 지부인 누스라전선을 결성했다. 누스라전선의 세력이 커지자, ISI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로 통합을 선언했다. 누스라전선과 알카에다 본부는 이 통합을 거부했다. 바그다디는 통합을 밀어붙인 뒤 올해 6월부터 이라크 영내 쪽으로 대공세를 벌여,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시리아와 이라크 영내에 영국 크기의 영역을 확보했다. 바그다디는 자신이 칼리프로 취임하며, IS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모든 무슬림의움마’(이슬람공동체)인 칼리프 국가로 선포했다.

 

IS는 중동전쟁이 키운 이슬람주의 세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923일부터 미국의 주도로 시작된 IS의 시리아 영역에 대한 공습은 중동전쟁의 3기를 알리는 사건이다. 이슬람주의와의 전면전이다.

 

중동전쟁의 양상은 걸프전 이후 국가 사이의 재래식 전쟁보다는 게릴라전의 항상화 등 비대칭전으로 바뀌고 있다. IS와의 전쟁으로, 이제 중동전쟁은 개전과 종전이 뚜렷이 구분되는 재래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쪽은 지상군도 없이 공습 등으로 전쟁을 하려 하고, 다른 한쪽은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산지사방에서 비정규전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전쟁의 장기화·항구화·상시화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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