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

산풀내음 2018. 4. 10. 21:09

어느 날 밴드에 士爲知己者死(사위지기자사)란 글이 올라왔다. 이미 익숙한 말이었지만 그 어원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해 구글링을 해 보았다. 결론은 춘추시대 예양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아껴준 주인 지백을 위해 그를 죽인 조양자에게 복수를 결심하면서 한 말이었다. 두차례나 복수를 시도하였지만 하늘의 뜻이었는지 성공하지 못하고 그는 결국 자결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는 것이라서 그러한지 지백의 인품에 대하여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는 부분이 없는 듯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양은 그런 주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록과 같이 지백의 인품이 인정미가 없고 덕망이 신통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며, 만약 지백이 전쟁에서 이겨 조양자를 굴복시키고 나아가 더 좋은 책사를 얻게 되었다면 그래도 여전히 예양을 아끼고 그를 인정하였을까? 자신을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충직한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예양을 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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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아 읽으면서 사람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행복을 느끼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고 하였던가?


그러나 현실을 돌아다보면 우리는 누구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사과하는 것에는 더욱 인색하다. 특히 상사가 부하에게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잘못을 부하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 볼 수있다.


어쩌면 칭찬과 사과에 인색한 것이 현실이기에, 칭찬하고 사과를 잘하는 리더가 더 많은 존경을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는지도 모르겠다. 리더십의 가장 쉬운 해결책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춘추시대 진(晉)나라는 기원전 632년에 남방의 대국 초(楚)를 격파한 후로는 중원의 패권자로서 약 100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그러다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는 남쪽의 초(楚)와 함께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반면 새롭게 양쯔강 하류의 오(吳)와 월(越)이 새롭게 부흥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과 함께 진의 내부에서는 실질적인 권력을 쥔 여섯 귀족, 즉 '지(知)씨'·'범(范)씨'·'중행(中行)씨'·'조(趙)씨'·'한(韓)씨'·'위(魏)'씨,의 발호와 함께 분열되고 있었다. 진후(晉侯)의 실질적인 지배력은 거의 없어 직접 지배하는 지역은 여섯 귀족이 지배하는 지역 중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정치 또한 실질적으로 여섯 귀족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섯 귀족들은 진후의 지배력을 배제해 나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로간에 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지배력을 확대했다. 그 중에서도 지(知)씨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그 당주가 '지백(知伯)'이란 사람이었는데, 영리하긴 했으나 총명하지 않았고, 인정미가 없어 덕망이 신통치 않았다. '지백'은 우선 '범씨'와 '중행씨'를 쳐 없애고는 그 영토를 병합했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중신인 '한·위·조 3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우선 한씨에게 사신을 보내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했다. 한씨의 한강자(韓康子)는 분개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현을 바친다. 이어 지백은 위씨의 위선자(魏宣子)에게도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위환자 역시 어쩔 수 없이 현을 헌상하였다.

여세를 몰아 조씨에게도 같은 요구를 하지만 조씨의 조양자(趙襄子)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백은 한씨와 위씨의 군사와 함께 조씨의 진양성(晉陽城)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무려 3년간 지속되었지만 조양자는 결사항쟁의 자세로 조금도 물러남이 없었고 오히려 한씨와 위씨를 설득하여 지백의 군대를 역습하는데에 성공하게 되었다. 전쟁에 패한 '지백'은 바로 참살되었다.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술잔(일설에는 변기)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지씨' 집안은 모두 멸문을 당했다. 또 '지백'의 모든 영토는 '조·한·위' 3국에 의해 남김없이 분할됐다.

망한 것은 '지백'에 그치지 않았다. '진(晉)나라' 공실의 운명 자체도 문제였다. 그 당시 군주였든'정공(靜公)'은 무능하여 ‘가문 타령’만 일삼았는데, 영토가 '한·조·위'에 의해 분할되면서 궁전에서 쫓겨나 서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종가 격인 '주(周)' 왕실은 이 같은 현실을 수십년 동안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기원전 403년에 '한·조·위'를 제후국으로 공식 승인하고 말았다. 이는 곧 전국시대의 개막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 나라를 3진(三晉)이라 불렀다.



지백의 가신 중에 지백의 총애를 받던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으나 명성을 얻지 못하다가 ‘지백’을 섬겨 중용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趙)·한(韓)·위(魏)’의 연합군에게 패할 당시 산속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그는 지백의 복수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今智伯知我. 我必爲報讎而死. 

以報智伯, 則吾魂魄不愧矣.

(사위지기자사, 여위열기자용. 금지백지아. 아필위보수이사. 이보지백, 즉오혼백부괴의.)

"사내대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용모를 꾸민다고 들었다.

지백은 나를 알아준 사람이다. 내 기필코 원수를 갚은 뒤 죽겠다. 

이렇게 하여 지백에게 은혜를 갚는다면 내 영혼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궁중의 변소 일을 하는 죄수로 가장해 들어가 비수를 품고 조양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양자가 변소에 가다가 갑자기 살기를 느껴 수색을 한 결과, 비수를 품고 있는 예양을 잡았다.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예양의 자백에 좌우 신하들은 당장 처형할 것을 조양자에게 권했으나 조양자는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해서 피하면 된다”며 풀어줬다




그러자 예양은 포기하지 않고 몸에 옻칠을 해 피부병 환자를 가장하며 숨어 다니다가 조양자가 다니는 길목의 다리 밑에서 기다리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 역시 조양자가 탄 말이 놀라 살피니 예양이 숨어 있음을 알아 그를 붙잡아 꾸짖었다



조양자는 그의 충정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성한 것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내가 그대를 석방하는 것도 이미 충분하였으니, 더 이상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

예양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름과 지조를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다고 합니다. 전날 군왕께서 신을 너그럽게 용서한 일로 천하 사람들 가운데 당신의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오늘 일로 신은 죽어 마땅하나 당신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베어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도록 해 주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것은 신이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은 것뿐입니다.”

조양자는 그를 의롭게 여겨 자기 옷을 예양에게 주었다. 예양은 칼을 빼들고 여러 차례 뛰면서 옷을 친 후, 마침내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