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진/전남

땅끝 사찰, 미황사와 도솔암

산풀내음 2019. 11. 13. 20:51

도솔암


내장사 순례를 마치고 우리나라 육지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미황사로 발길을 옮겼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미황사에 우리 부부 정도는 하루를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템플스테이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웬걸, 이미 정원이 다차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조용한 시골 사찰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땅끝마을에 위치한 캠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은 가을이어서인지 캠핑장에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깔끔한 시설과 처음 경험해 보는 카라반에서의 하루는 또다른 맛이 있었다. 아내와 삼겹살에 막걸리를 한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날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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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맞이한 일출

우리나라의 땅 끝에 위치한 해남에는 금강산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달마산(489m)이 있다.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지맥이며 이는 다시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산 전체가 기암인 달마산에는 천년고찰로 우리나라 육지 중에 가장 남단에 위치한 사찰인 미황사(美黃寺)가 있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 숙종 18년(1692년)에 세웠다는 부도암 사적비에 미황사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되어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지금의 송지면 땅끝)에 와 닿았다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 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히 배가 멀어져 갔다.
이를 듣고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 화상(義照和尙)이 장운(張雲), 장선(張善) 두 사미(출가하여 계율을 받은 어린 남자)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 화엄경(華嚴經) 80묶음, 법화경(法華經) 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 등이 있었고 금환과 혹석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 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혹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호탄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 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고 일렀다. 이에 의조 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하여 '미황사'라는 사찰의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열두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며, 이후에도 세번의 중건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 기간 사세를 유지해 온 듯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1887년 혼허(渾墟) 스님이 절의 중창을 위해 40여명의 서산대사진법군고단을 이끌고 가던 배가 청산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스님 한 분을 제외하고 전원이 생명을 잃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스님들이 흉액을 당하자 불자들도 찾지 않는 절이 되고 말았고, 이후 100여년 동안 나무와 잡풀만 무성한 사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금강스님이 1989년 이곳 미황사로 오면서 미황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기초작업은 금강 스님이 하셨고, 1991년에는 사찰 건축에 남다른 감각을 가지신 현공 스님에게 주지의 소임과 함께 사찰 중건도 맡기고 선방으로 떠난다. 선방 수행 중 잠시 미황사에 들르자 이번에는 현공 스님이 아무런 말도 없이 절을 떠났다. 그러자 금강 스님은 현공 스님을 찾았고, 둘은 앞으로도 함께 미황사를 꾸려가기로 타협을 했다. 미황사를 중창하려던 원력을 세웠던 현공 스님은 회주로서 불사를 계속 담당하고, 대중들 앞에 나서기를 극구 꺼리는 현공 스님 대신 승가대 학생회장 출신인 금강 스님이 주지로서 사찰 운영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로부터 둘은 환상의 콤비로 지금의 미황사를 만든 것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사랑받는 절’ 해남 미황사엔 금강·현공 스님 공력 있었네")

미황사


미황사에는 유명한 것이 세가지가 있다. '달마고도', 대웅전의 '천불도', 그리고 '석양'이 그것이다.
미황사에서 시작해 큰바람재, 노시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총 길이 17.74km의 '달마고도'는 주지로 계시는 금강 스님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금강스님은 2012년 국회의원 신분으로 미황사를 방문한 현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둘레길을 제안했고, 이 총리가 전남도지사 시절 공사를 시작했다. 금강 스님은 해발고도 220∼380m의 달마산 중턱에 옛날 달마산에 있던 암자 12개를 잇는 길을 기획했다. 매일 40명 인력이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삽, 호미, 곡괭이만 사용해 250여일 만인 2017년 11월에 완공된 길이다. 

미황사를 출발, 달마산의 산허리를 따라 산을 한바퀴 돌아 미황사로 돌아오는 트레킹 길인 달마고도는 4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나는 이 중에서 4구간만을 경험해 보았는데 각종 자료에 소개된 것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구간은 미황사 사천왕문 옆에서 시작하는 2.71㎞로 암자터와 문수암터, 너덜겅, 산지습지, 수정굴 등을 거친다. 숲길을 따라 1㎞가량 가면 거대한 너덜지대가 나온다. 달마고도에는 이러한 너덜지대가 20여 곳이나 된다. 
2구간은 4.37㎞로 농바위, 관음봉, 암자터, 미타혈, 금샘 등을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과 함께 지난다. 2코스 끝자락에 서면 한곳에서 서해와 남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3구간은 5.63㎞로 노시랑골에서 몰고리재로 이어지는 길이다. 아름다운 골짜기다. 편백조림지와 노간주 고목 등을 볼 수 있다.
4구간은 몰고리재에서 미황사로 돌아오는 길로 5.03㎞이다. 이미 조성된땅끝 천년 숲 옛길과 겹친다. 용굴과 도솔암, 편백숲과 미황사 부도전을 볼 수 있다.  
미황사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천왕문이 나온다. 이곳이 달마고도의 시작점이다. 나는 미황사를 찾은 또다른 이유인 도솔암에 가기 위해 4구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편안한 흙길을 따라 오늘의 순례를 시작하였다. 부도전, 너덜지대, 편백숲을 지나니 그 동안의 번뇌가 절로 씻기는 듯한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중간에 도솔암으로 빠지는 샛길이 나온다. 다소 가파른 돌길이지만 15분 정도 오르면 탁트인 해남의 경관에 모든 것이 보상되는 듯하다. 도솔암은 달마산 정상 암릉 위에 살포시 앉아 있다. 당초 그곳은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던 자리라고 한다.


도솔암 올라가는 길



도솔암은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되었던 암자로 2002년 오대산 월정사의 법조 스님이 3일 연속 선몽(先夢)을 꾼 뒤 32일 만에 법당을 복원하고 단청까지 마쳤다는 불가사의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도솔암 삼성각에서 바라본 도솔암

도솔암 삼성각


도솔암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

도솔암에서 나와 미황사로의 길은 달마고도 대신 달마산의 능선길을 택했다. 불썬봉(489m)까지 가서 미황사로 내려오는 루트를 잡았지만, 중간에 어제 내장산에서 접친 발목에 무리가 오는 듯하여 불썬봉을 약 1km 남겨두고 하산할 수 밖에 없어 아직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달마산의 능선길은 흥미진진한 길이다. 다소 편하고 쉽게 달마산을 즐길 수 있는 달마고도와는 달리 산행의 묘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길이라 할 것이다. 몇몇 산악인들만의 길이라 생각했는데 달마고도 보다 이곳 능선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분볐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더 도전해 보고 싶다.

달마산 능선길

달마산 정상에서 바라 본 남해 바다



달마고도 만큼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미황사을 찾는 불자라면 반드시 봐야 할 것으로 대웅보전의 '천불도'가 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천불도의 일부


보물 제947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1982년 보수공사 중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 작성)에 의하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되었다. 법당 안에는 목조삼존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의 천장에는 범어(인도 싼스크리스트어)로 쓰여진 글자와 일천불의 벽화가 있다. 『현겁경』을 근거로 한 해남 미황사의 천불도는 대웅전 사방 내목도리 윗벽 21곳과 두 대들보 양 측면에 각각 그려진 그림인데, 부처의 수가 정확히 1,000이다. 현재 대들보에 있는 네 점의 그림을 제외한 판벽 그림들은 훼손이 진행되는 바람에 모두 떼어내 보관 중이다.
(출처 : 불광미디어, "[사찰벽화이야기] 해남 미황사 천불도")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미황사에서 보는 석양이다. 특히 미황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응진당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일출에서 기를 받고, 일몰에서 위안을 얻는다.

대웅보전 뒤로 응진당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 하는데 미황사에서는 응진당이라고 한다.

대웅보전에서 석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규모의 응진전이 외벽 담을 두르고 서 있다. 미황사의 副佛殿인 응진당(보물 1183호)은 석가모니부처님, 좌우에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패가 모셔져 있다. 특히 응진당 내부 벽면에 수묵(水墨)으로 그려진 나한 벽화는 유려한 선맛이 선필(禪筆)의 경지를 보인다. 건축연대는 1982년 대웅전 보수공사 때 대들보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웅전과 같은 해인 1751년 상량(上樑)된 것으로 18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출처 : 미황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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