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7일

광복군 창설

산풀내음 2016. 8. 21. 12:36

1940 9 17,  광복군 창설

 

1940 917일 새벽 6.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ㆍ중(韓ㆍ中) 양측 인사 200여명이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직구성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무장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첫 발을 내 디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감격이었고 임시정부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에 뛰어들 기회가 왔다는 의미였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기념사진 -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장 임명장을 받는 지청천 장군 - 출처: 국가보훈처

 

또한 광복군은 좌우 통합의 상징이었다. 좌파 계열의 최대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함으로써 드디어 좌우를 아우른 민족의 국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년 뒤 300, 2년 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西安),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 했고, 1941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을 맞았다.

 

광복군이 창설된 이듬해인 1941 12 8,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고,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어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버마를 침략한 일본과 대치 중이었으며,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과 정보 수집 및 포로 심문 등의 작업이 필요하자 임시정부 측에 광복군의 투입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43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印緬戰區工作隊)라는 이름으로 광복군 대원들을 파견하였고, 인도에 도착한 대원들은 영국군에 배속되어 공동작전을 수행했다.


 

연합국일원으로 인도 미안마 등으로 파견, 영국군과 합동작전

 

광복군은 또한 미국 전략첩보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연합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 2지 대장 이범석은 미국 14항공대 쉬노우더와 중경에 있는 주중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서 한미합작의 합의를 하였고, 1945 2월 김학규 3지대장과 미군 14항공 사령관 첸놀트 장군은 한미공동작전 관련 6개항에 합의 했다.

먼저 섬서성 서안과 부양에 한미군사합작을 위한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를 했는데 임시정부는 광복군 제2지대와 광복군 제3지대로 하여금 미군의 지휘 아래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OSS 특수훈련을 3개월 동안 받게 하였고, 마침내 84일 훈련을 모두 수료한 1기 훈련생들은 국내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OSS훈련을 마친 광북군 제3지대 대원들.

 

1945 829일이 원래의 디데이였다. 국치일을 맞이하여 829일 국내진공을 염두에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8월초에 갑자기 일본 패망 임박하자 작전을 서둘러 변경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8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3개 지구대의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820일 안으로 함경도로부터 경남 남해까지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카탈리나 섬에서 한인요원들이 공중으로 국내진공을 하는 "냅코 프로젝트"도 구상했었다. 하지만 8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광복군 참모장 시절 이범석 장군

 

광복 후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 역시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결국 이듬해인 1946 6,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광복군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건국 준비 과정과 더불어 전개된 건군 과정에서 광복군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해방 후 건군 과정에 광복군 출신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바로 미군정에서 설립한 통위부(統衛部: 국방부의 전신)의 초대 부장으로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의 유동열이, 역시 미군정에서 창설한 예비 국군인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사령관에 광복군 제2지대장 출신의 송호성(宋虎聲)이 임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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