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7일,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
`벽을 넘어서-화합과 전진`을 캐치프레이즈로 한 제24회 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 16일간의 일정으로 개막됐다. 10월 2일까지 열린 이 대회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양진영 160개국 1만3천3백3명이 참가한 사상최대의 올림픽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자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다.
88 서울올림픽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아닌 박정희 시절부터 유치를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치를 건의한 인물은 10년 동안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였다. 1970년 아시안 게임의 경우 막대한 대회 개최 비용 때문에 반납했지만, 박종규는 올림픽 유치를 건의하고 박정희는 박종규를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임명해 이를 추진하게 한다.
1972년 유신 개헌과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은 점차 커져 갔고 특히 1978년 제9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전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 쏟아 나오기 시작하자, 박종규는 이런 민심을 바꿀 수 있는 계기로 이를 제안한 것이었다.
1979년 9월 3일, 국민체육진흥심의회에서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을 의결하였고, 9월 21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계획을 재가하였다.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계획을 정식 발표했다.
1979년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이후 올림픽은 흐지부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1979년 12.12 반란과 1980년 5.18 광주학살을 무마시키는 수단으로의 3 S(Sex, Sport, Screen)정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당시 유치 후보 도시가 나고야를 빼면 전무했다. 1972 뮌헨 올림픽의 뮌헨 참사 이후 보안비용이 폭증하고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 여파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론이 퍼지던 시점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몬트리올 시는 결국 파산하고 만다. 그래서 원래 계획 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알제리의 알제, 그리스의 아테네가 모두 발을 뺐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단독 개최지 선정이라는 모양새 안 나는 결과를 원하지 않던 IOC는 그냥 서울의 계획안을 통과시킨다.
그 누구도 나고야와 경합하여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유치보다는 몇 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은 일본과 아시안 게임 빅딜을 제안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시안 게임 빅딜은 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보장하고 대신 한국은 88년 올림픽 신청을 포기하는 건데, 일본이 이를 거절한다. 너무 유치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1981년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79명의 IOC위원의 투표 결과는 의외였다. 결과는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로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는 서울로 지정된 것이다.
절대로 서울을 지지하지 않을 나라들, 즉 심사위원 비율은 전체 위원 가운데 약 2할인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중압감과 북한의 각종 음해와 방해공작 속에서 52 대 27이라는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1981.9.30 AP연합. 총회에서 한국올림픽유치 대표단의 박영수 서울시장이 두 팔을 들고 환성하고, 좌측 정주영 유치추진위원장(현대그룹회장)과 우측에 조상호 한국올림픽 위원장이 기뻐하고 있다.
1984년 IOC 총회에 참가한 한국 대표 노태우, 박종규, 조상호와 당시 IOC 위원장 사마란치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을 비롯해,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올림픽유치 민간추진위원장에 임명되고 올림픽 유치를 위해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노력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의 메달 경쟁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여 5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2위는 금메달 37개의 동독, 3위는 금메달 36개의 미국이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로 부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또한, 이 대회는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7개가 쏟아져 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1988년 서울 올림픽때 메인스타디움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윤태웅(1981년 생)의 당시 모습.
그러나 100m 육상선수 벤 존슨의 약물복용과 더불어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타임지 온라인 판에서는 최악의 올림픽 개막식으로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선정해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올림픽 개막식 때마다 빠지지 않는 성화 점화식이 있다. 88 서울올림픽 때도 3명의 성화점화 주자들이 성화대에 올라 성화 점화를 했는데, 당시 성화대에 앉아 있던 비둘기떼가 성화 점화와 동시에 불에 타 죽었다. 이런 이유로 타임지는 '사실상 한국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파티였지만, 비둘기떼가 성화에 타 죽는 등 시작부터 불행했다'고 보도했던 것이었다.
문제의 성화 봉송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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