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0일

중국 신해혁명

산풀내음 2016. 9. 8. 23:04

191110 10,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중국 신해혁명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청조가 열강에게 무참히 짓밟히게 되자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은 때늦은 신정(변법파의 개혁을 많이 본 딴)을 추진하였다.

신정의 내용을 보면 36개 사단의 신군창설, 군사학당의 설치, 상부의 창설과 실업진흥, 과거제의 폐지, 지방학교의 설립 그리고 유학생의 해외파견 등 30개 항목에 달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08 10 50년간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가 광서제와 같은 시기에 사망하고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즉위하였다. 이에 어린 선통제를 대신하여 부친 순친왕 대풍이 섭정왕으로 실권을 잡았고 개혁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게다가 개혁추진 비용 마련을 위한 각종 세금들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고 신정반대, 세금거부, 그리스도 배격 등의 대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쑨원(孫文)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민족, 민주, 민권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창하는 한편 혁명파를 지휘, 반청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11년 청조는 철도 국유령을 내려 민영이었던 철도를 담보로 열강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으나, 이에 대한 광범한 반대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대규모의 무장투쟁인 쓰촨(四川) 폭동으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10 10일 혁명파의 공작으로 우창(武昌)에서 신군이 반란(우창봉기)을 일으킴으로써 신해혁명(辛亥革命, 또는 제1혁명)의 불길이 댕겨져 약 한달 만에 14()이 이에 호응,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으로 확대되었다. 신해혁명의 불길을 당긴 우창봉기의 날이 10 10일이어서 오늘날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쌍십절이라 불러 기념하고 있다.


 

쑨원(孫文, 1866-1925)


신해혁명의 주역들

 

한편, 베이징의 청조에선 10 12일 우창에서 도망쳐온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萨镇冰)으로 하여금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지만 이들이 제대로 청군을 통솔하지 못해 2년 전에 축출한 위안스카이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 27일 청은 위안스카이에게 반란군 진압의 모든 전권을 위임하였고 이어 11 1일에는 총리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순친왕은 위안의 요구대로 섭정에서 물러났다.


 

위안스카이

 

위안()11 2일 혁명군과의 전투를 시작으로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존 조던(Jordan, John)에게 부탁하여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결국 12월 2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하였고 그리고 영국 영사의 주선하에 12 3일에 양측이 3일간 정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를 남북의화(南北議和)라고 하는데 혁명세력이 강했던 남부지방과 위안스카이 등 청조세력의 북부지방의 협상을 의미한다. 이후의 혁명은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되었다.

 

남북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에서 각 성 대표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2월 29 17성 대표의 선거에 의해 쑨원은난징 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고 1912 1월 1에는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쑨원이 총통에 취임했다.

한편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아들인 위안은 청 왕조 타도에 적극 나섰다. 결국 2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86년간에 걸친 청조가 무너짐과 동시에 진의 시황제 이래2000년 간 지속되던 황제 지배 체제가 막을 내렸다.


1912 2 15일 난징에서 쑨원이 임시정부 관원들과 함께 한족(漢族)의 마지막 왕조였던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의 능을 참배하고 있다.

 

이어 3 11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총통직을 이양 받았고 이후 위안은 황제의 야심을 가지고 혁명파를 탄압하는 한편 독재정치를 펼쳤다. 이에 1913 7월 국민당은 '원세개 타도' 운동을 벌이며 혁명을 호소,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제2차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원세개는 군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해버렸다.

이후 원세개는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락하는 등 매판성을 드러냄으로써 이러한 원세개의 독재정치에 대해 민중들은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이를 ‘제3차 혁명’(호국전쟁)이라 불린다. 그리고 1916년 원세개 사후 내전과 군벌들의 할거로 혼란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