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0일

오랜 앙숙 터키-아르메니아 국교수립문장의 구성

산풀내음 2016. 9. 8. 23:19

200910 10,

오랜 앙숙 터키-아르메니아 국교수립

 

2009 10 10일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과 에드바르드 날반디안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국교 수립 의정서와 관계 발전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오랜 시간의 반목을 끝내고 화해의 시대로 맞이하게 됐다. 양국은 의정서가 의회 비준을 얻어 발효된 날로부터 2개월 이내 국경을 개방하기로 했다.


 

 

이날 서명식에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정책대표,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등 양국 관계 정상화를 촉구해온 국가들의 외교 수장이 자리했다.

 

양국이 화해 협력을 선택한 데에는 터키 입장에서는 EU 가입에 힘을 얻고 유럽행() 석유, 가스 채널인 코카서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 입장에서는 터키와 교역 확대를 통해 경제 발전을 꾀하고 서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기대가 깔려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간의 감정은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 제국 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사회는 19세기로 들어서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재산을 모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전쟁으로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 북동부를 점령하였고 이후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인의 권리 향상을 목표로 한 개혁 실시를 약속했다. 이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령 내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민족 운동이 시작됐고, 이는 1984년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과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

그 결과 압둘 하미드 2의 치세인 1894에서 1896에 걸쳐 당시 이스탄불 등 서쪽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 전체 국토에서 아르메니아인이 집단 살해됐다.

 

두 번째는 제1 세계 대전 중인 1915에서 1916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연합국 측의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점령했다. 이때 아르메니아인 게릴라들의 행동은 오스만 제국 내의 반아르메니아인 감정을 지폈고 이는 집단 학살로 이어졌다.

두 번째 학살과 관련하여 아르메니아는 터키의 전신 오토만제국에 의해 150만 명이 살해된 계획적대량학살이라고 주장한다. 제국 치하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강제 이주되면서, 터키인들에 의한 학살과 굶주림 등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반면, 터키는 오토만제국이 붕괴되는 혼란의 와중에 30~50만 명이 숨졌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터키는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를 독립국으로 가장 먼저 승인했지만 학살을 둘러싼 역사적 앙금 때문에 이웃 국임에도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 채 있다가, 1993년 동맹국인 아르제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가 점령하자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을 폐쇄했다.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르메니아계가 1988년부터 아제르바이잔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오는 것을 지켜보다 이들 주민 편을 들며 전쟁에 개입,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양국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6년여에 걸친 양국의 유혈 충돌은 35천여 명의 사망자를 낸 뒤인 1994년 러시아 등의 중재로 끝났지만, 이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됐다.

 

1993년 국경 폐쇄에 더하여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판한 터키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가 국가모독죄로 기소되고 극우파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것은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보여준다.

 


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현장

Picture showing Armenians killed during the Armenian Genocide. Image taken from Ambassador Morgenthau's Story, written by Henry Morgenthau, Sr. and published in 1918. Original description: "THOSE WHO FELL BY THE WAYSIDE. Scenes like this were common all over the Armenian provinces, in the spring and summer months of 1915. Death in its several forms---massacre, starvation, exhaustion---destroyed the larger part of the refugees. The Turkish policy was that of extermination under the guise of depor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