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0일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산풀내음 2016. 9. 8. 23:11

194510 10,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해방과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은 서둘러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회는 서울에 있었고 지도자는 박헌영이었다. 한반도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할 점령 초기에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남한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를 받았다.

 

북한을 점령통치하게 된 소련군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있는 지도부의 명령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공산당 조직을 북한지역에 결성하도록 지도했다. 김일성과 김책 등 일제말기 시베리아에서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박헌영과 관계가 좋지 않은 북한거주 공산당원들을 지원하여 북한지역의 독립적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도록 공작했다.


 

황해제철소(현 황해제철연합기업소) 1호 용광로 조업 식에 참석한 김책 내각 부수상과 김일성(). (촬영시기 58년 추정). 김책은 후일 그의 이름을 딴 김책제철소와 김책공업종합대학이 건설될 정도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소련군의 그러한 공작에 따라, 10 5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는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지만, 결론 없이 대립만 하다 분국 창설의 과제를 10 8일 밤의 박헌영과 김일성 비밀회동으로 떠넘겼다.

결국 분국 창설은 두 사람의 협의로 큰 문제없이 통과됐고 10 10일 비밀리에 소집된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본회의에서 마무리됐다.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대리)에는 김용범이 제2비서에 오기섭과 무정이 선출됐고 김일성은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5 10 23일 북조선분국의 설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김일성이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의 저항이 컸고, 소련도 국내 투쟁경험이 적은 김일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기에는 아직 지명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박헌영()와 김일성()

 

소련군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김일성 파의 세력이 우세해지도록 공작한 끝에 1945 12 17일과 18일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도록 지도했다. 그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분국이 설치된 지 2개월 만에 김일성은 조직을 장악하게 된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책임비서 김일성은 북한지역에 완전히 독립된 당 중앙기관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제부터는 조직의 명칭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아닌 북조선공산당으로 변경하자고 제의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명칭변경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김일성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파 간의 격론 끝에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파가 국내파를 제압하고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결의 후 두 파간에는 격렬한 갈등이 야기되었으며, 소련군은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김일성파로 하여금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의 사용을 당분간 보류하도록 조정했다.

 

이러한 소련의 조정에 따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 12월에 북한지역의 공산주의자 조직의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결정해 놓고도 그것을 공식명칭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북한의 언론매체에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46 4 19일이다. 이날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소공동위원회의 5호 성명에 대한 북한 공산주의자 조직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공식 사용되었다.

 

북조선공산당은 당세를 확장하고 대중 정당화하기 위해 1946 8월 그 해 초 북한지역에서 창당된 모택동 노선의 공산당인 조선신민당을 흡수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오늘날 북한의 출판물들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언급하지 않고 1945 10 10일부터 북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1948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일성(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