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5일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 마타 하리 총살

산풀내음 2016. 10. 5. 20:08

191710 15,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 마타 하리 총살


 

Colorization by klimbims

 

1917 1015,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 마타 하리가 파리 교외에서 총살돼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마타 하리가 훔친 군사기밀은 연합군 5만명의 죽음에 상당하는 것”이라는게 프랑스 군사법정이 밝힌 사형선고 이유였지만 구체적인 활동내용을 밝히지 않아 지금까지도 사실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Actual photo of troops and observers at Mata Haris execution. She does not appear to be visible. Firing squad is lined up at right.


 

마타 하리의 본명은 M.G.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 1876 8월 7 -1917 10월 15)네덜란드의 리우와르덴(Leeuwarden)에서 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상하길 좋아했던 이 평범한 소녀의 나이 13세 되던 해 13살 무렵 아버지가 파산했고, 부모가 이혼했다. 함께 살던 어머니는 2년 뒤 숨졌고, 15살의 그는 재혼한 아버지 대신 대부였던 피서르(Visser)라는 이와 함께 살게 된다. 유치원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그는 학교장의 음탕한 놀림에 시달리다 학업을 중단했고, 얼마 뒤 헤이그의 삼촌 집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As a young girl Margarethas father, Adam Zelle, spoiled her with expensive gifts, like this goat-drawn cart


Schoolgirl Margaretha, rear row far right


As a young girl Margaretha was sent to live with relatives. At 16 her school principal tried to take advantage of her. Scandal ensued.

 

 

그녀 나이 19세 때인 1895년 스무 살 연상이며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 주둔군 장교 C. 매클라우드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근무지인 인도네시아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남편은 자주 바람을 피웠고, 그나마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이어주던 두 아들까지 남편이 옮긴 매독 감염 후유증으로 잇달아 숨지면서 그녀의 결혼 생활은 결국 7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Margaretha was not quite 19 when she fell for Rudolf Zelle, a syphilitic drunk and gambler twice her age. She would always have a weakness for uniforms.


In 1897 Margaretha (front row, left) followed her husband (back row, second from left) by boat to his posting in the Dutch East Indies. Notably, she wears the same dress as in the photo above.

 

 

남편과 이혼하고 돈 한푼 없이 1902년 파리로 돌아와 정착하면서 그의 인생은 격류에 휩싸인다. 파리에서 젤러는 프랑스 외교관 앙리 드 마게리의 정부가 돼 동거에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모를 내세워 무희로 나서게 된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흥행사의 눈에 띄어 정식 댄서가 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젤러는 1905년 몽마르트 클리시거리에 새롭게 개장한 물랭루주(Moulin Rouge)에 나타나 프렌치 캉캉과 함께 명물이 되었다. 그녀의 춤은 정통 발리 댄스라기 보다는 일종의 스트립쇼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이국적인(exotic) 풍광에 목말라 하던 당시 유럽인들에겐 큰 흥미거리가 되었다. 젤러가 스스로의 이름을 마타 하리(Mata Hari)로 바꿔 스스로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마타 하리라는 이름은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새벽의 눈'이라는 뜻이다.

 

마타 하리는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의 파리에서 타고난 미모와 누드에 가까운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고, 프랑스 사교계 고위층에서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했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댄서로의 인기를 바탕으로 파리의 상류사회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점차 고급 창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With every veil I threw off, my success rose. Pretending to consider my dances very artistic and full of character, thus praising my art, they came to see nudity, and that is still the case.  - Mata Hari -



Lover of Fashion


 

마타 하리는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어는 은행가와 내연관계를 맺었지만 하필 그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도리어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좋지 않은 소문으로 프랑스에서 다시 재기하는 것이 녹녹하지 않아 그녀는 1914년 독일 베를린으로 간다. 이곳에서 경찰과 교제를 가졌는데 중부 유럽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에 대해 민감한 첩보 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 정보부는 그녀가 독일의 스파이로 포섭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때부터 받기 시작한 의심으로 그녀는 훗날 스파이로 영국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한다.

 

제1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육군 정보부에서 그녀에게 접근하여 거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프랑스 육군의 정보를 빼내기로 그녀와 계약한다. 당시 그녀가 출연하는 클럽은 프랑스의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사, 외교계 고관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어서 독일측은 많은 기대를 했으나 그녀는 그다지 많은 정보를 수집하지 못했다.

 

대전 중반, 프랑스 육군 정보부에서도 그녀의 스파이 행동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접근하여 오히려 독일측의 정보를 빼내올 이중 스파이로 만들고 독일 방첩기관장을 유혹하여 접근 시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보낸다. 그러나 이 임무 역시 독일측이 눈치채서 실패. 독일은 오히려 그녀에 대한 역정보를 프랑스에 흘려 프랑스측은 그녀가 여전히 독일을 위해 일한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중)첩자였다는 확증은 없다. 1917 2 17일 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뒤 그와 연루된 연합국 진영의 뭇 명사들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데 급급했다. 그녀는 변호사의 조력조차 받지 못했다. 프랑스 법원은 “마타 하리가 빼돌린 군사 기밀은 연합군 병사 5만 명의 목숨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 산술의 근거 역시 물론 알려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