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5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5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

산풀내음 2016. 10. 5. 20:15

196310 15,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5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

 

1963 10 15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의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인 15 6026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대 대통령 취임식


1963 12 17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제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는 박정희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당시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이른바혁명공약을 내걸었고, 1961 812일 성명을 통해 1963년 여름까지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공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재집권을 위한 일련의 작업들을 수행했다. 먼저 중앙정보부와 학자들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는 1961 10월경 신당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신당은 이듬 해 초부터 사전 조직작업에 착수해 3월 말까지 중앙조직의 골격을 마련했고, 연말까지 1000여명을 중앙정보부에서특수교육을 시켰다. 신당은 1963 2 26일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 이름으로 창당됐다.

 

창당 준비와 함께 1962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하면 1968년까지 6년여 동안 정치활동을 못하게 했다. 소급입법인 이 법에 의해 민주당 등의 중요 정치인 269명이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다.

 

이후 민정이양 과정은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출마하겠다고 공언했는데도, 1963 2 16일에 열린 3군 수뇌회의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이에 박정희는 2 189개항에 이르는 시국 수습안을 받아들이면서 민정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국방부장관과 3군 참모총장이 배석한 가운데 군 중립화가 선언됐다. 227일에는 여야 정치지도자와 군 대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정희의 2.18 제안을 수락한다는 엄숙한 선서식을 가졌다. 그 무렵 박정희의 잦은 변심을 가리키는 飜意(번의)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박정희는 3 16일 민정 불참과 민정 이양 약속을 깨뜨리고 군정 5년 연장가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함으로써 모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사흘 뒤인 3 19일에 케네디 미 대통령도 민정복귀를 희망한다고 말하고, 친서를 보내 순조로운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처럼 반발이 커지자, 박정희는 국민투표를 보류하고 정치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는 군정도 민간인도 아닌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차기 정권을 선의의 경쟁으로 결정하려는 것, 혁명 주체세력이 민간인의 자격으로 제3공화국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정희의 출마는 기정사실화됐다.

 

5 27일 공화당은 박정희를 후보로 지명했다. 그리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3 7 27일 대통령 선거를 10월 중순, 국회의원선거를 11월 하순에 실시할 것이며 군정 후 최초의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해 제3공화국의 탄생이 선포될 것이라는 총선거실시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대하여 재야 각 당은 "이번만은 다시 번의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전제를 붙여 환영했다.

이어서 박정희는 8 30일 강원도 철원군 7사단 연병장에서 다음의 한 구절로써 전역의 인사를 代()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전역사를 남기고 전역했다.


 

1963 8 30,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


전역식 도중 누물을 훔치는 박정희와 유영수 여사.


전역 후 눈물을 흘리는 박정희

 

 

야당은 분열되어 여러 정당이 생겨나서 각각 후보를 추대하자, 7월에 민정당의 김병로, 신정당의 허정, 민우당의 이범석 등의 영수들이 회합해 하나의 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에 9월에 국민의 당이 탄생했지만, 윤보선이 승복하지 않아 국민의 당에서 허정, 민정당에서 윤보선이 후보로 나왔다. 자유민주당은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을 지명했는데, 며칠 후 구속되고 말았다. 이 밖에도 정민회의 변영태, 추풍회의 오재영, 신흥당의 장리석이 나왔다. 선거과정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해 허정과 송요찬이 후보를 사퇴했다. 실제 선거구도는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 간의 양자대결로 짜졌다.

 

1963년 대선에서 가장 흥미 있는 사건은 사상논쟁이었다. 윤보선은 유세에서여수·순천사건에 박정희가 관련되어 있다고 폭로하고, 황태성 북한 간첩이 박정희를 접촉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사상논쟁이 제기되자 공화당은 이를 역이용하는 전략으로 나갔다. 우선 사상논쟁이 과거 선량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치던 한민당의 매카시즘적 수법을 되풀이하는 소행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공직채용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고, 민정이 수립되면 감옥에 있는 혁신계 인사들을 석방하겠다고 공약했다.


5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시민들. (1963.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