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산풀내음 2016. 10. 5. 20:21

197110 15,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박정희 정부는 영구집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대학의 병영화를 시도했고, 그 첫 번째 조치가 대학생 교련과목의 신설이었다. 1969 10월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통과 시킨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인 1970 2 23, 국무회의를 열어 대학 교련 개정안을 확정, 새 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다.

 

신학기 직전인 225일 당국은 교련강화 지침을 발표했다. 1969년 시행 당시 선택과목이던 교련을 교양필수로 격상했고 현역군인을 교관으로 대학에 진입시켰다. 남학생은 주 3시간 학과와 방학 집체 훈련 포함 총711시간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교련은 전체수업의 20%로 졸업 때까지 7학점을 채워야 했다. 전시에도 대학 군사훈련 비중이 이렇게 높은 적은 없었다. 교수들조차 항의데모를 부추겼다. 한 대학총장은 “데모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1학기 데모가 투석전으로 변하는 등의 상황에서도 일부 대학에 잠시 휴업령을 내렸을 뿐 센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그 해 4월엔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학생들은 교련반대 데모를 벌이다 전력을 공명선거 감시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1971 4 27일에 있었던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가까스로 이기자 부정선거 논란까지 가세하면서 대학가의 저항은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저항이었다.


 

7대 대통령 선거 유세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들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4. 27 선거를 불법, 부정, 관권 선거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거부로 상징화 되었다. 문교부는 5 27일 서울대에 휴업령을 내렸고, 61일 서울대는 처음으로 시위 학생에 대해 자체 징계조치(제명 3, 자퇴권유2, 무기정학 17)를 내렸다. 한편 정부는 강경대응을 자제하고 대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하며 병역단축 혜택을 주는 완화 방침을 내놓았다.

 

하지만 2학기가 들어서도 대학가의 데모는 진정되지 않았다. 국무총리가 “(교련을) 압박감 부담감 없이 체육을 한다는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현역군인이 시간강사급으로 3040명씩 진주해있던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그들을 캠퍼스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교련 허수아비, 군복 화형식도 일어났다.

 

결국 1971 10 15일 “데모로 흐트러진 학원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군을 투입해 달라”고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의 형식적인 요청을 육군은 받아들여 위수령이 내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전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 “교련 반대를 빙자한 불법데모로 질서가 파괴된 대학에는 학원의 자유 자주 자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경찰은 학원 안에 들어가서라도 데모 주동학생을 색출하고 안 되면 군을 투입해서라도 질서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학생들의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 난동은 일체 용납할 수 없다”면서 “주동학생을 전원 잡아들여 학적에서 제적하라”고 명령했다.

 

이날 정오 무렵 공수특전단과 수도경비사령부의 무장군인, 헌병대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캠퍼스에 진입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집총한 군인들이 학교 별로 2백∼5백 명씩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군인들은 말 그대로 인정사정이 없었다. 강의실을 덮쳐 학생들을 연행하고 달아나는 학생 뒤를 쫓아가 워커 발로 까고 정강이를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1971 10 15일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서울 지역에 발동한 위수령에 따라 대학에 진주한 군인들이 한 대학에서 학생을 연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려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은 강의실까지 들어가 문을 부수고 학생들을 연행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 방은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던져 ‘너구리 잡듯’ 학생들을 체포했다. 여학생 십여 명이 최루가스에 질식해 쓰러졌다. 놀라 도망가는 학생들을 총과 곤봉을 든 군인이 쫓느라 캠퍼스 안에는 비명과 고함이 어지러웠다. 학교주변 주민들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야수적 폭력현장’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훔쳤다.

 

연세대에서는 교련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던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며 집단폭행 당했다. 이를 항의하던 교수들도 군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학생처장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6.3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이젠 통곡을 해도 해결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학교의 연락을 기다려라”며 울먹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서울문리대 법대와 성균관대 외대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위수령은 1965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가의 시위에서 처음 발동되었다. 대학생들의 반대 데모가 계속되자 당시 윤치영 서울시장이 요청해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내려졌다. 법적인 근거가 없던 위수령에 근거를 부여하고자 만든 것이 1970년 대통령령 제4949호로 본문 22개조와 부칙이다.

법에 따른 최초의 위수령은 1971 10 15일 각 대학에서 반정부시위가 격화되었을 때 서울 일원에 발동된 것이었으며, 두 번째가 1979 10 20일 마산 일원에 내려진 것으로,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자 그 권한정지가처분을 신청하고 제명함에 따라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반대데모가 격렬하게 일어난 데 따른 조치였다.

 

10 17일 각 대학은 시위 주동학생 174명을 제적했다고 문교부에 보고했다. 당국은 제적된 학생들이 재입학 하거나 편입학을 못하도록 학칙을 고칠 것을 대학에 지시했고 국방부는 문교부로부터 제적학생 명단을 넘겨받아 1차로 47명에게 입영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도 시위 주동자와 제적 학생에 대해 특별 검거령을 내렸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들은 바로 수도통합병원으로 끌려가 간단한 신검절차를 거쳐 논산행 입영열차를 타야 했다.

 

시위 주동학생 제적, 학칙 개정, 영장 발부 등을 완료한 당국은 10 23일 오전 각 대학에 주둔한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리고 11 9일에는 위수령을 해제한다. 그리고 1년 뒤인 1972 10 17, 박정희 대통령은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