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8일

무솔리니, 로마 진군

산풀내음 2016. 10. 9. 23:27

192210 28,

무솔리니, 로마 진군

 

1918,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6 28일에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강화 회의가 열려 독일은 조약에 조인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은 패전국에게 너무나 가혹하였다. 독일은 식민지 전부를 잃게 되었고, 게다가 금화 1320억 마르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였다.

 

전승국의 경우도 모두가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만족스러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도 이탈리아는 가장 큰 불만을 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 중에 60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65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는데도 결과는 '회복할 수 없는 이탈리아'가 되어, 패전국이나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은 전후 경제의 혼란과 겹쳐 이탈리아의 정국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세력을 뻗게 된 것이 무솔리니(Benito Andrea Amilcare Mussolini, 1883 7월 29 ~ 1945 4월 28)가 이끄는 파시스트 당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대장장이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 때 왕립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원 자격을 취득, 중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사직하고, 3년 동안 스위스 등지를 방랑하였다. 1904년에 귀국하여 신문기자로 활약하였다.

 

무솔리니는 웅변에 뛰어났고, 그 정열적인 연설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이 사회당 안에서 주목 받는 존재가 되게 하였다. 1912년의 사회당 대회에서 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당 기관지 전진(아반티)’의 편집장으로 발탁되었다.

 

1914,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동요하여 노선을 정하지 못할 때 참전론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제명되었다. 그는 일간지 이탈리아 인민을 발간하여 참전론을 펴고 사회당을 공격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1919 3, 사회당에서의 탈락자와 군인 출신을 모아서 본격적인 파쇼 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노동자의 경영 참가와 8시간 노동 및 여성의 참정권 등 사회주의적인 표어를 내거는 한편, 반사회주의 노선에 선 것이다. 또한 의회 정치와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강력한 국가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전투 파쇼를 파시스트 당이라 개칭하고, 1922 10 28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의용군인 `검은 셔츠단(camicie nere; CCNN)` 4만 명이 로마로 진군했다. `볼셰비키 분쇄`, `위대한 이탈리아`를 외치며 퀴리날궁을 향해 행진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군경은 보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전부터 파스타 내각에 자신을 포함한 좌파 간부들의 입각을 요구해 왔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로마 점령을 위한 행군을 강행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파스타 임시 수상이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긴급회의에서는 계엄령을 내려 무솔리니군을 저지하기로 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이 계엄령에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파스타는 사임했다.

 


로마로 진군하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들

 

10 29일 국왕은 허약한 민주주의 정부 대신 `볼셰비즘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할 것처럼 보였던 무솔리니에 내각구성 지시를 내렸고 무솔리니는 10 31일 수상이 되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비록 정권은 장악했으나 의회에서는 소수파였기 때문에 무솔리니는 1923, 전체 투표 총수의 4분의 1 이상의 표를 차지한 제1당이 의원 총 수의 3분의 2를 차지한다고 하는 기묘한 선거법 개악을 행하였다. 이것은 '프리미엄 선거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예정대로 1924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파시스트당은 65%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고, 이 선거의 결과 지금까지 34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던 파시스트 당이 전체의석 535석 중 대번에 375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무솔리니는 최대의 정치원 수가 된 사회당 서기장 마테오티를 암살하고, 1926년에는 일당 독재 체제를 완성하였다.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즘 체제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자본가와 지주의 이익은 보호를 받았으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일반 민중의 생활수준은 유럽에서 가장 밑돌게 되었다. 무솔리니는 국민의 불만을 대외적인 모험으로 타개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피우메 시를 강탈하고(1924),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1927), 에티오피아 침략을 감행하고(1935), 스페인 내란에 개입하였다(1936~1939).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나치스 독일 편에 서서 참전했으나, 이탈리아군은 보급도, 사기도 한껏 저하되어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였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게릴라에 의해 체포되어 그의 정부(情婦)와 함께 총살당하였다. 그 시체는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전시되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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