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8일

고문 기술자 이근안 자수

산풀내음 2016. 10. 9. 23:36

199910 28,

고문 기술자 이근안 자수

 

12년째 도피 중이던 그리고 ‘인간 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고문 대부’라는 별명으로 익숙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전 경기경찰청 공안분실장이 1999 10 28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했다. 쑥색 점퍼, 감색 신사복 바지차림의 이씨는 검찰 당직실로 불쑥 들어가 당직계장인 김명진씨에게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내가 이근안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1988년 12월 잠적한 지 꼭 11년 만이었다. 이근안은 김근태 전 민청련의장을 전기 고문한 혐의로 지난 1988년 12월 24일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이씨는 공군헌병 출신으로, 지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1972년부터 대공업무에 근무하게 된 그는 매번 특진으로 승진을 거듭해 1984년 경감이 됐다. 고문 혐의를 받고 잠적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대공분야에만 몸담은 공안통이었다. 대공-공안분야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재직기간 동안 청룡봉사상 등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간첩 검거 유공’이 4회나 포함돼 있다. 22년 동안 간첩 누명을 쓰고 살다가 2005 7월 무죄 선고를 받은 함주명 역시 이 전 경감의 고문에 못 이겨 간첩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1983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앞길을 걷다가 납치되듯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함씨는 이 전 경감으로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아 30년 동안 남파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강요 받고 악몽과 같은 고문에 시달렸다.

 

몽둥이로 온몸을 때리는 것은 기본이고, ‘칠성판’에 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를 들이대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 새끼발가락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 보내는 전기고문이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고정간첩으로 활동해왔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이 멈춰졌다고 한다. 결국 함씨는 지난 8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1998년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나기까지 16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이근안은 연행자들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 보이면서 “내가 손대면 입을 열게 돼 있다”는 등 위협적인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기고문, 물고문, 관절 뽑기, 날개 꺾기, 집단 구타, 볼펜심 신문, 통닭구이 등 각종 고문에 통달한 그는 종종 다른 기관에까지 ‘고문 출장’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학림사건’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한 기고문에서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은 「선데이서울」을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며 “나 역시 온갖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의 소재지를 댔다”고 고백했다. 또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그가 고문을 하면서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 그때 가서 복수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김근태 전 의원(1947-2011)()과 함주명씨

 

이근안은 7년 형을 선고 받고 여주교도소에 복역했으며 2006 11 7일 만기 출소하였다. 그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고문으로 명성을 날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근안은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생활을 하다가 2012년 교단으로부터 목사직 면직 판결을 받기도 했다. 그는 목사 생활 중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며 본인의 고문을 정당화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논란을 빚었다.

 



[ 김근태 고문 사건 관련 진술 ]


김근태 고문사건은  1985년 12월 19일 민청련사건 첫 재판에서 김근태가 모두진술을 통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김근태의 모두진술은 충격적이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매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5일, 9월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중략)........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 앞에 다가와
(이 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면서 진술함)
이때 마음 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중략)......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발췌 -

http://www.kdemo.or.kr/blog/people/post/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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