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0월/10월 28일

10. 28 건대 점거농성 시위

산풀내음 2016. 10. 9. 23:32

198610 28,

10. 28 건대 점거농성 시위

 

1986 10 28일 전국 26개 대학 2000여 명의 학생들이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련) 결성식을 가졌고 경찰의 강제 진압으로 건대 안으로 피신한 학생들은 이후 4일간 건국대를 점거, 경찰과 대치했다.

당시 이들은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 화형식'을 가지고 '반공이데올로기를 부수자'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보도지침에 의한 강력한 언론통제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도권 언론사들은 이들을 '좌경용공분자', '빨갱이'로 보도했다. 계획된 점거 농성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추위에 떨고 굶으면 농성을 이어가야 했다.

 

 

점거 대학생들은 1)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분쇄하고 그 앞잡이 전두환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족자주와 민중민주주의의 정권을 수립한다, 2)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고 민족의 자립화를 이룩한다, 3) 전두환 일당의 독재정치를 타파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4) 한반도의 분단구조를 철폐하고 한민족의 염원인 조국 통일을 실현한다 등을 주장하였다.

 

결국 10 31 '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력이 투입되어 5개 건물에서 분산 농성 중이던 학생 1,520여 명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290명을 구속했다. 당시 단일사건 구속자수로는 세계최고의 기록이었다고 한다. SY44 최루탄이 끊임 없이 발사되었고 소방차는 물을 내뿜고 헬기는 쉴새 없이 소이탄을 투하했다. 이와 같은 전방위적 입체 진압 작전으로 대학생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불과 90분 만에 66시간 50분 동안 지속된 농성 상황은 종료된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당한 학생을 옮기고 있다.


진압에 헬기 2대가 동원되었으며 국내 시위진압에 첫 투입 사례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86년에는 상당수의 학생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교도소로 들어오면서 교도소 역시 일선 교도관들과 경비교도대를 동원해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특히 11 6일에 법무부는 전국의 교도소장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수감중인 학생들에 대해 순화교육을 시키도록 하여 탄압을 부추겼다.

 

그런데 학생들의 점거 농성 기간중인 10 30일에 정부가 북한이 금강산 근처에 금강산댐을 지어서 터뜨려서 200억 톤의 수공을 하려 한다는 발표를 하고 당시 방송사에서 금강산댐 수공관련 특집방송까지 했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렇게 해서 '북한은 수공위협을 하는데 북한편을 들고 반정부 데모하는 학생을 모조리 잡아들여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건대 항쟁에 대한 검찰중간수사 발표 후 애학투련 대학생들은 정부와 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빨갱이 낙인이 찍혀 있었다. 11 3일에는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전두환 정권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통련은 국민적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용공사건 조작의 주체인 전두환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1 4일에는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의 발의자에는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인과 함석헌, 백기완과 같은 재야 민주화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두환 독재 아래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대학생들이 모두 그랬듯 당시 부산산업대(현 경성대) 대학생이던 진성일은 사건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1986 11 5일 오후 12"건국대 농성사건 해명 및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부치고 부산산업대의 5층 건물에서 투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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