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15일

중국 3대 악녀 중 한 명인 서태후(西太后) 사망

산풀내음 2016. 10. 15. 06:54

1908 11 15,

중국 3대 악녀 중 한 명인 서태후(西太后) 사망

 

중국의 3대 악녀라고 하면 유방의 조강지처로 유방 사후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여태후,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자식도 버린 측천무후, 그리고 청나라를 망하게 한 서태후를 지칭한다

서태후(西太后, Empress Dowager Cixi, 1835 11월 29 ~ 190811월 15)는 만주 관리의 딸로 태어났지만 부친이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나자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제의 세 번째 황후가 되었다. 8대 동치제의 생모로 그리고 제9대 광서제의 이모로 나이 28세부터 수렴청정하여 48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 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고 좋아해, 황태후로 된 후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랫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7대 함풍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함풍제가 죽은 후 서태후가 낳은 6살 난 아들이 1860년 황제가 되었고 이가 동치제 (同治帝, 1856 4월 27 ~ 1875 1월 12)였다.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서태후의 본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 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 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1861 서태후는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한 숙순 등의 대신들을 숙청하였고 동태후와 함께 섭정에 나섰다. 두 태후의 섭정 외에도 동치제의 숙부인 공친왕마저 정치 일선에 나서서 당시 정국에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강한 집착을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은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다.

 

한편 동치제가 나이가 들면서 친정을 희망하였지만 친모인 서태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둘간에 알력이 생긴다. 그러니 동치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 때도 동치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 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동치제는 나이 스물을 못 넘기고 1874년에 죽었다. 동치제의 죽음과 관련하여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였다. 하지만 민간에선 매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황후와 사이가 좋았음에도 서태후의 엄중한 감시 속에 잘 만날 수가 없었고, 서태후와의 갈등 등으로 힘든 상황에서 환관의 권유로 사창가에 드나들면서 매독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어의는 사실을 고하지 못하고 천연두에 걸렸다고 했고, 엉뚱한 처방이 이뤄진 끝에 동치제는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황실 어의 이덕입(李德立)은 후에 '황제를 진찰하였을 때 성병 초기 증세가 있었지만 황실의 명예와 체통이 걸린 일이라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동치제를 이을 왕으로 서태후는 4세밖에 안된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 광서제 (光緖帝, 1870 8월 14 ~ 190811월 14)를 옹립하고 수렴청정을 이어갔다. 1881년 동태후 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자 이제 권력은 사실상 그녀의 독차지가 됐다. 동태후의 죽음과 관련해 44세의 이른 나이에 급사해서 서태후에 의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병상 기록 등이 발견되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암살해야 할 정치적 타당성이 없다는 점 등이 지적되면서 독살설은 수그러들었다.

 

서태후는 사치와 타락한 생활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다고 한다.

 

Empress Dowager Cixi and women of the American legation. Holding her hand is Sarah Conger, the wife of U.S. Ambassador Edwin H. Conger.

 

서태후는 건강을 위해 사람의 젖을 매일 먹었다. 젖이 잘 나오는 두 부녀자를 선발해 이들이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상의를 입고 유두만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앉으면 태후는 침상에 누운 채로 젖을 먹었다. 궁에서는 부녀들이 좋은 젖이 나올 수 있도록 닭이며 오리, 생선, 돼지 등 산해진미를 제공했으나 소금이나 간장은 넣지 않았다. 젖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로지 서태후에게 바칠 젖을 달게 하기 위해 좋은 음식을 약 먹듯 먹어야 했다.

 

또한 서태후는 포악하기로 유명하였다. 예를 들어 그녀의 포악함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가 황제로 올려졌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다가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한 내시는 꾀를 내어 머리를 빗겨 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겨 주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도 한다.

 

후에 광서제가 성인이 되면서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와 정치적으로 충돌하였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1898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변법파는 서태후를 제거하려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린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만다.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10년간 유폐 당하였고 결국 1908 11 14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으며 광서제는 시해 당한 것이었다. 조카였던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이미 본인 생일잔치에서의 과식으로 이질에 걸려 병석에 있었고 결국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 11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3 8월 전역식에서 한 말,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Memorial tower of the tomb of Empress Dowager Cixi

 

2011년 홍콩에서 출간된 영문판 저서 만주국의 몰락’ (중문판 제목은 태후와 나’)는 서태후가 이질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청나라 말기 중국에서 생활한 영국인 에드먼드 트렐로니 백하우스(1873-1943) 1943년에 썼던 초고가 바탕이 됐다. 이 책에서 그는 서태후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08 1115일 아침 서태후는 베이징 황궁의 접견실에서 위안스카이 등 두 명의 원로대신을 접견했다. 두 사람은 서태후에게 퇴위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을 젊은 황제(마지막 황제 푸이)의 섭정인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화가 치민 서태후가 두 사람을 모반죄로 기소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리볼버 권총을 꺼내 서태후의 복부를 향해 3번 방아쇠를 당겼다. 서태후는 흥건하게 피를 쏟은 채 두 사람을 참수하라고 요구하며 최후를 마쳤다. 서태후를 시중들던 환관들은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광서제의 사인에 대해서도 서태후가 광서제에게 독극물인 비소를 넣은 케이크를 먹게 한 뒤 이를 눈치챈 영국 공사가 검사할 것을 요구하자 환관을 보내 광서제를 목 졸라 죽였다고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