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2일

존 F. 케네디 피살

산풀내음 2016. 10. 18. 22:27

1963 11 22,

F. 케네디 피살


 

1963 11월 존 존 F. 케네디 (John Fitzgerald "Jack" Kennedy, 1917 5월 29 ~ 1963 11월 22) 미국 대통령이 정치 유세를 위해 텍사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 민권에 관한 입법을 강력히 지지해 온 그의 정치적 입장으로 1964년 대통령 선거가 채 일년도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부 지역에서의 그의 인기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1 22일 미국 댈러스를 방문 중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날 낮 12 30분 무개차를 타고 재클린 케네디와 도심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케네디 대통령의 자동차 행렬은 천천히 엘름가에 들어섰다. 대통령의 차량이 엘름가로 진입하는 코너를 돌고 나서 몇 초 후 첫 번째 총성이 울려 퍼졌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해 누군가 쏜 축포일 거라 생각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총성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몇 초 후 암살범의 총구에서 2발의 총이 케네디 대통령을 향해 발포되었다. 2번째 총탄에 목을 관통 당한 케네디 대통령은 목을 부여잡았고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챈 재클린은 남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2번째 총알이 케네디에게 날아든 뒤 몇 초 후 3번째 총알이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대통령이 저격 당했다!" 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곧 공포와 혼란이 엘름가를 덮쳤다.

 

 

대통령의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해 근처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의 차량에 다가갔을 때 차량내부는 피로 흥건한 상태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부인 재클린에게 안겨있었다. 뒤이어 다른 차량에 있던 부대통령 린든 존슨은 경호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 받으며 병원의 작은 방으로 대피했다. 의사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되살리려고 갖은 노력은 다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대통령은 숨을 거둔 후였다. 오후 1시 공식성명발표에 의해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경찰은 대대적으로 암살범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사건 발생 2시간쯤 뒤 근처 극장에 숨어있던 교과서 보관 직원이었던 하비 오즈월드(Lee Harvey Oswald, 1939-1963)를 암살 혐의로 체포했다. 그러나 오즈월드는 자신의 범행 사실을 부인함과 동시에 "나는 희생양이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 24일 경찰서에서 감옥으로 압송하기 위해 경찰서 지하실을 나오던 중 경찰들이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경영자 루비(Jack Ruby)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살해장면도 TV에서 생중계되었다.

 

Oswald being led from the Texas Theatre after his arrest inside

Lee Harvey Oswald, suspected assassin of President John F. Kennedy, grimaces as he is shot to death at point-blank range by nightclub owner Jack Ruby.

 

케네디의 복수를 위해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큰소리친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Jack Ruby)는 범행 직후 대통령 살해범을 쏜 것이라 가벼운 형 일줄 알았는데 사형을 언도 받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감옥 안에서 불안해했고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호소하였으며, 범행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곳에선 말을 할 수 없으니 워싱턴에서 조사받기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1967 1월 기침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옥중에서 사망했다. 


 

관련자의 연이은 사망으로 사건은 조사도 시작되기 전 무성한 소문만 양산했다.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점점 확산되어가자,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 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은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법원장 어얼 워렌을 위원장으로하는 ‘암살 조사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조사위원회는 10개월 뒤 “이 사건은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며, 그를 사살한 루비에게는 어떠한 배후도 보이지 않는다”는 워렌 보고서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워렌 보고서가 발표된 후에도 범행동기가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자 의혹이 다시 증폭됐다. CIA 음모설, FBI 관련설에서부터 쿠바의 카스트로 지시설 등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먼저 정밀조사 결과 오스왈드에게는 발포 흔적이 없었고, 조잡한 구식 총으로는 80m 떨어진 건물 6층에서 단 6초 만에 3발을 발사해 이동 중인 케네디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명사수라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체포 초기 12시간 동안의 조사기록이 없어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리고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법의 총알(Magic Bullet)이다.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쏜 단발의 총알로는 케네디와 앞좌석의 코널리에게 총 일곱 군데의 총상을 입히기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며 오스왈드의 군시절 형편없던 사격솜씨로는 케네디의 머리에 정확히 저격할 수 없으므로 제2, 3의 장소에서 오스왈드와 함께 케네디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저격범들과 케네디 암살을 주도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 미국 국민 74퍼센트의 견해이다.

 

  

케네디 암살과 관련하여 가장 유력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CIA관련 설이다. 케네디 이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쿠바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피그만 침공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계획은 케네디 취임 직후인 1961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케네디의 CIA에 대한 신뢰는 급락했다. 따라서 CIA의 여러 해외 공작에 대하여 케네디는 자주 제지를 하였고 서로간에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다. 또한 당시 케네디는 CIA 덜레스 국장 등 주요 간부들을 대폭 해임시켰고 CIA의 주요 권한을 대통령 직속 참모본부로 이관시켜 CIA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케네디를 암살한 용의자로 체포된 오스월드는 자신의 혐의를 끝까지 부인함과 동시에 자신은 희생양이라고 했고, 1993년 오스월드의 부인의 폭로에 따르면 당시 CIA에서 자기를 찾아와 오스월드가 케네디를 죽였다고 증언하라고 강요와 함께 살해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스월드를 죽인 잭 루비는 나이크클럽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CIA요원이었으며 잭 루비의 죽음도 암으로 인한 자연사가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여기에 더하여 오스월드도 CIA요원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의심스러운 점이 사건 발생 15분만에 범인으로 지목된 오스월드의 몽타즈가 나왔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