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2일

인도-파키스탄 무력충돌, 전면전쟁화

산풀내음 2016. 10. 18. 22:38

1971 11 22,

인도-파키스탄 무력충돌, 전면전쟁화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인도에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8세기부터였다. 조금씩 인도를 침입하던 이슬람 세력은 바부르가 인도의 혼란을 틈타 갠지스 강 유역을 정복하고 델리를 수도로 삼아 무굴 제국을 세우면서 완전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무굴(Mughal)이란 아랍어로몽골을 뜻하는데, 이는 바부르가 칭기즈 칸의 후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무굴 제국은 다수 주민인 힌두교도를 회유하지 않고서는 인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힌두교도외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이 때문에 무굴 제국은 인도 반도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인도에는 이슬람 세력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Army of the Mughal Empire

 

그러나 너무 급진적으로 인도 전체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면서 힌두교도들의 불만을 사게 되어 결국 제국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굴 제국이 혼란에 빠진 18세기 후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영국은 자유 통상권을 얻으며 점차 세력을 넓혀 갔다. 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영국은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주민들 간의 단결을 막기 위해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대립시키는 정책을 폈다. 당시 알라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세상 만물을 신으로 섬기는 힌두교 간에는 충돌이 잦았고, 영국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의 다툼을 교묘하게 용해서 인도인들을 분열시키는 식민지 정책을 썼던 것이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05, 영국은 벵골 분할령(Act of Bengal Partition)을 발표한다. 인도 북동쪽에 있는 벵골은 영국의 통치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이었다. 이 법은 이슬람 신자가 많이 살던 곳을 동벵골, 힌두교 신자들의 지역을 서벵골로 나누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이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분노한 인도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저항했다. 영국산 면직물을 불태우고, 상점과 공장 문을 닫았다. 인도국민회의에서는 '영국 물건을 사지 말자', '국산품을 애용하자', '인도인의 손으로 인도를 통치하자', '교육만이 힘이다'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결국 1911년 벵골 분할령은 폐지되었지만, 종교 간 갈등을 일으키려 했던 영국의 속셈은 오랫동안 인도 사람들 가슴속에 남았다.

 

 

힌두교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교의 무함마드 알리지나가 이끄는 전인도이슬람연맹이 일치 단결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수의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따로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 했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Mohammad Ali Jinnah and Mohandas Gandhi in 1944.

 

결국 1947 6 3,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Francis Albert Victor Nicholas Mountbatten, 1900-1979)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간디는인도를 생체 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 15,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 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 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면적은 22만여㎢로 한반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카슈미르 서쪽지역인 파키스탄령 카슈미르가 380만명, 인도령 카슈미르(인도에선 잠무-카슈미르주로 칭함) 820만명 가량이다.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이고 힌두교 신자가 소수다.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카슈미르는 수많은 외침으로 안정적 정권을 유지한 시기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1586년 무굴제국에 복속되기 전까지는 대체로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카슈미르는 시크교도 통치를 거쳐 인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카슈미르는 1947년 영국 식민지배에서 파키스탄과 인도가 각각 분리할 즈음 운명의 갈림길에 선다. 파키스탄이나 인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카슈미르에선 인도 국민회의당의 자와하를랄 네루가 주창하는 세속주의에 동조해온 지도자 셰이크 압둘라가 득세한 상황이었다. 세속주의는 종교공동체 주의를 거부하고 남녀평등 등 세속적 가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 때문에 나라가 쪼개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압둘라 때문에 카슈미르가 인도로 넘어갈 처지에 놓이자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의 논리는 카슈미르가 지정학적, 언어학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파키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당연히 파키스탄에 편입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 북서변경 지역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파탄족을 동원, 1947 7월 카슈미르를 전격 침범했다. 파탄족이 카슈미르 수도인 스리나가르 점령을 시도하자 인도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파키스탄과 인도가 영국 식민지배에서 각각 독립하면서 발발한 카슈미르 전쟁은 1949 1월까지 1 6개월간 지속됐다.

 

Muslim refugees attempt to flee the New Delhi area by train in September 1947. In total, as many as 9 million Muslims would migrate from India to Pakistan in the aftermath of partition.

Sikh refugees from the Pakistani side of the Punjab. Researchers estimate that over 5 million people, most of them Hindus and Sikhs, migrated from Pakistan to India in the years immediately following partition.

Partition in India. September 1947. Moslems waiting to leave for Pakistan as they seek protected transport to Dot Purana Qila, an ancient fort in Pakistan

 

Indo-Pakistani War of 1947

Armed tribesmen in Kashmir during the 1947 Indo-Pakistani War.

 

1949 11일 인도와 파키스탄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결의에 따랐고 7월 상호간의 화해합의서에 서명했다. 반면, 카슈미르공국에 대한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않았다. 결국 주로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는 자무와 카슈미르지역은 인도정부의 관할구역으로 남겨지게 됐다.

 

이어서 자무와 카슈미르지역의 영토분쟁에 대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제 2차 전쟁은 1965년에 발발했다. 전쟁은 큰 규모로 확산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작전들이 개별적으로 제한됐고 5일만에 끝이 났다. 그리고 1966 1월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의 중재 하에 양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립문제에서 일시적으로 카슈미르지역에 대한 부분은 상호 문제삼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타쉬켄트협정을 체결했다.


 

1965 Indo-Pak War Memorabilia – 25 Indian Artillery guns captured in Chhamb Sector

Pakistan Patton tanks captured by India during the 1965 war.

 

1971년에는 다른 문제로 전쟁을 겪었다. 당시 동파키스탄 (현재 방글라데시)이 서파키스탄 (파키스탄)에 불만을 품고 독립하려 하자 인도가 동파키스탄 편을 들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양국은 카슈미르 지역과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맞붙었다.

 

1947, 파키스탄은 처음에는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분리된 형태로 독립했는데, 이는 벵골 분할령 때문이었다. , 서파키스탄은 지리적으로 1,600km나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언어도 문자도 민족도 풍습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인구는 동파키스탄이 훨씬 더 많았지만, 정치는 서파키스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정부의 예산도 서파키스탄 중심으로 쓰였고,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공무원이 돼도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 정도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 밖에도 불편한 점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에 또다시 갈등이 시작되었다. 물론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1952년 파키스탄 건국 직후 오직 우르두어만을 공식 표준어로 지정했다. 벵골어를 쓰던 동파키스탄에선 대학생을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서 벵골어도 표준어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벵골 지역의 동파키스탄인들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Female students of Dacca university marching on Language Movement Day, 21 February 1953.

 

1970 11 12일 저녁 무렵 동파키스탄을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 호는 20세기 최대의 자연재해 중 하나였다. 3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참혹한 재난을 맞은 동파키스탄 주민들은 인도의 인접 지역과 비교하며 자기네가 국가로부터 방치되어 있었다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의심을 더욱 굳혀준 것이 정부의 무성의한 구호활동이었다. 예컨대 정부는 구호활동에 수송기 한 대와 경비행기 몇 대만을 내놓고 서파키스탄에 있던 헬리콥터는 보내지 않았다. 언론에서 지적이 있자 인도에서 영공 통과를 허용하지 않아서 못 보냈다고 둘러댔다.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총선거가 닥쳤다. 1956년 영연방을 벗어나 공화국이 된 후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군사독재 아래 있다가 이제 의회민주주의를 시작하려고 첫 총선거를 치른 것이다. 1970 12 7일 시행된 이 선거에서 동파키스탄의 지역당 아와미연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극도에 이른 동파키스탄인의 불만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300석의 지역구 중 162석이 동파키스탄에 있었는데 아와미연맹은 그 중 2석을 빼놓고 석권했다. 10석의 여성 대표와 3석의 비 이슬람 대표까지 의회 총원 313석의 과반수였다. 줄피카르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이 81석으로 제2당이 되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출신의 아히야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총선 압승 결과를 무효 처리했고 이에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아히야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사태가 악화되자 아히야 칸 대통령은 1971년 초 동파키스탄으로 가 무지부르 라만 아와미 연맹 당수와 회담을 벌였지만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1971 3월 7 라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 다카에서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동파키스탄을 벵골인의 나라를 국호로 삼아 방글라데시의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9713월 26 아침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서 전면 파업과 함께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동, 서 지역의 대립은 결국 내전화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라만 당수의 독립 선언 행동에 깜짝 놀란 파키스탄군은 라만 당수를 체포해 서파키스탄의 감옥으로 압송하였다. 수많은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독립군을 결성하였고 서파키스탄은 즉시 군대를 동으로 파견하였다.

 

서파키스탄군은 학살, 강간 등을 수시로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약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만 명의 벵골인들이 헬게이트가 열린 동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도망쳤다.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헬게이트를 열어 약 600만 명의 벵골인이 인도로 피난오자 인도 입장에서도 이 파키스탄 내전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인도는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면서, 1971년 군사적 원조를 포함해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뱅골인-이슬람교도들의 국가를 만들려는 동파키스탄을 지지했다. 인도의 지지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제3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전쟁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으로 사상자도 가장 많았다. 그리고 이 3차 전쟁은 파키스탄의 동쪽지역뿐만 아니라 서쪽지역까지 전체적으로 발생했다.

 

1971 11 22일 시작된 인도-파키스탄 양군간의 무력충돌이 12 3일 전면전쟁으로 확대됐다. 3일 파키스탄공군기들이 서파키스탄과 인접한 서부인도의 8개 공항을 공격했고, 이에 대해 인도는 지상군 3개 사단을 서파키스탄에 투입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동파키스탄내에 국한됐던 충돌은 사실상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전환됐다.

 

 

이 전쟁은 전투가 시작된 지 14일만인 12 16일 파키스탄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16일 밤 현지의 니아지 파키스탄군사령관이 무조건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동시에 인도군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대카시에 입성했다.

 

이후 동파키스탄은 벵골의 나라를 뜻하는 방글라데시로 국명을 바꿔 방글라데시로부터 독립했다. 현재도 인도에서는 다수의 힌두교도들과 소수의 이슬람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인도의 뭄바이에서 발생한 테러는 이슬람 세력인 파키스탄의 무장 단체에 의한 것이었다.

 

1971 12 16일 대카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파키스탄군 사령관

 

'역사속에 오늘, 11월 > 11월 22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캄보디아 ‘물의 축제’ 중 378명 압사  (0) 2016.10.18
존 F. 케네디 피살  (0) 2016.10.18
SOS 채택  (0) 2016.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