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3일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산풀내음 2016. 10. 19. 20:16

1945 11 23,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1945 11 18일 소련군이 주둔한 평안북도 신의주 서쪽에 있는 용암포에서는 공산당 주도로 광복 직후 전국 각지에 조직된 민중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연단에 올라간 학생대표는 애초 축하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지만 연설 도중 소련군과 공산당의 행패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군중도 이 연설에 동조하며 분노했다.

 

군중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련 군정 상태였지만 한반도 최북단 접경 지역인 신의주는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였다. 소련군은 여성들을 겁탈했고, 군정을 등에 업은 공산단체도 약탈 등 행패를 일삼아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공산당 환영대회가 순식간에 공산당 규탄대회로 변해가자 당황한 주최 측은 이를 무력으로 막는 데 급급했다. 소련군과 공산당은 경금속 공장 직공들을 동원해 군중을 급습, 평안교회 장로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학생과 시민 11명이 크게 다쳤다.

 

또한 11 21일 신의주 용암포의 구세학교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수산학교 4학년생 최병학 군이 기념사를 통해 폐교 조치된 용암포수산기술학교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인민위원장 이종흡의 만행 등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런 사건 들에 격분한 신의주동중학교와 제일공립공업학교 등 6개 중학교가 주축이 된 지역 학생 3,500여명은 11 23일 오후 2시 행동에 나섰다. 학생들은 "공산당은 소련군의 군사력을 악용해 약탈, 불법, 기만 등 갖은 학정을 자행하고 있다" "적색 제국주의 침투를 위해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획책해 이를 좌시할 수 없어 궐기한다"는 호소문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이어 4개조로 나눠 각각 평북 인민위원회, 공산당 본부, 신의주 보안서(경찰서), 재판소를 향해 행진했다.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울려 퍼지던 신의주 시가지는 공산당과 소련군이 진압에 나서자 참혹한 '킬링필드'로 변했다.

 

1945년 신의주 학생 의거 당시 신문에 실린 주요 참여 학생들 모습.

1945년 신의주 학생 의거에 참여했던 생존자들이 1990년 해후하던 모습. 맨 오른쪽이 엄보영씨. <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 제공 >

 

시위대를 향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무차별 사격으로 23명의 학생이 피살됐고, 7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투옥됐다. 사건 후에도 검거선풍이 불어 2,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체포 구금됐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도 이때 수감되는 고초를 겪고 단신 월남했다.

 

1956년에는 학생의거가 일어난 11 23일이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될 정도로 대표적인 반공운동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1973년 각종 기념일이 통합 폐지돼 반공 학생의 날이 사라지면서 신의주 학생 의거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

 

1956 '반공 학생의 날' 제정 기념식 (출처: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