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1월/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

산풀내음 2016. 10. 19. 20:20

1946 11 23,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

 

1946 11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로동당(南朝鮮勞動黨, Workers Party of South Korea)이 결성되었다.

 

남조선노동당 간부들

 

8.15 광복 이후 남한에는 여러 좌파 정당들이 있었지만,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조선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정지 상태에 있었으므로,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을 재정비가 필요했고,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두 달 앞둔 1946 7월 남북 좌익세력간에 새로운 결집 논의가 진행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북로당 결성은 소련 군정 지원 하에 순조롭게 진행돼 8 28일 창당됐지만, 남로당은 미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예정보다 늦게 이뤄졌다.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주도권 장악문제로 여운형과 박헌영은 지속적으로 갈등하였다. 박헌영은 좌익 3당의 합당을 통해 민전을 강화하고 투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었고, 여운형은 좌익정당 합당보다는 우익세력과 연대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당연히 박헌영은 우익과의 연대를 반대했다.

 

1946 2, 박헌영()여운형(). 일생의 동지였다가 좌우합작 문제와 3당합당 문제 등으로 서로 앙숙관계가 되어버렸다.

 

합당 문제가 수렁에 빠져들자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간부파, 조선인민당의 48인파, 남조선신민당의 중앙간부파만으로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북조선노동당이 박헌영을 지지하였고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46 9 4일 신민당 회의실에서 3당 합동 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여기서 합당결정서를 정식으로 가결했다. 그리고 이미 조직된 3당 합동 준비위원으로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결당 준비공작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반대파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발했다.

 

이런 과정에서 9 6일 공산당의 핵심 간부 이주하가 경찰에 구속되었고, 9 7일에는 박헌영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어 공산당이 주도하는 `9월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는 `10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0월 초순 박헌영은 마무리를 심복 이승엽에게 맡기고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다. 결국 3당 합당은 박헌영 계열의 일방적인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11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남로당 결당식이 있었고, 12 10일에는 중앙본부가 조직되었다. 위원장에 허헌(신민당), 부위원장에 박헌영(공산당), 이기석(인민당)이었으며, 중앙위원은 공산당 14, 인민당 9, 신민당 6명이었다.

 

이때 각 당의 반대 세력들은 10 16일 모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하기로 하고 강령(초안)을 발표했고, 11 1일에는 사회노동당 임시 중앙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출했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강진이었다.

하지만 11 7일 여운형은 남로당에 대해 무조건 합동을 제의한다. 하지만 남로당측의 이승엽은 사로당의 해체만을 고집했고, 남로당은 끝내 거절한 채 11 23일 결당식을 감행했다. 이로써 3당 합동은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분열된 채 끝났다. 그러나 사로당은 1947 2 27일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발전적 해체`를 결의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남로당은 초기에 주로 합법적으로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고, 한편으로는 노동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투쟁 등을 주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0 1일 대구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러다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이 전개되던 무렵에 남로당 세력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운동 노선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어 각종 테러나 게릴라 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면서 남한 정부를 흔들어 놓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남부군 사건 등이 있다.

 

1948 8월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였고, 1949 6월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당사실은 대외적으로뿐만 아니라 일반당원들에게조차 숨겨진 비밀합당이었다. 그래서 1949 6월 합당 후에도 남한에서 활동한 남로당원과 게릴라들을 선동하고 격려하는 문서에는 여전히 남로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남로당 대신에 합당된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였다.

 

박헌영을 주축으로 월북한 남로당파는 처음에 북조선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잡았으나, 한국전쟁 후를 즈음하여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었다. 이후 남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남로당파가 숙청으로 사라진 뒤에도 '남로당'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던 조선로동당의 지부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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