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9일

임시정부,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산풀내음 2016. 11. 1. 20:34

1941 12 9,

임시정부, 태평양전쟁 발발 하루 만에 대일 선전포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 12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개전 하루 만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951 9, 48개국 연합국과 일본간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될 때 이승만이 이 선전포고를 근거로우리도 연합국 일원으로 조인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임시정부 26년사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당시 연설을 하는 백범 김구 주석 출처: 독립기념관

 

선전포고는 광복군이라는 무장병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1940 9 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출범 당시 부대원이 30여명에 불과했지만, 조선의용대 일부 세력과 중국 국민당의 군사원조를 받아 체계를 갖춰갔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이후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은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과 정보 수집 및 포로 심문 등의 작업이 필요하자 임시정부 측에 광복군의 투입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43 8 13일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印緬戰區工作隊)라는 이름으로 광복군 대원들을 파견하였고, 인도에 도착한 대원들은 영국군에 배속되어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인도에 파견된 광복군 대원들 –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제3지대 산동지구 특파단 대원들 – 출처: 독립기념관

 

영국과의 연합작전 외에도 광복군은 미국과의 합작을 추진하였는데, 바로 미국 전략첩보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연합작전으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라 불리는 국내진공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첩보, 폭파 등 지하공작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한반도 각지에 투입시켜 미군의 상륙을 위한 사전공작을 전개하는 위험천만한 작전이었다. 임시정부는 중국 서안에 위치한 광복군 제2지대와 부양에 위치한 광복군 제3지대로 하여금 특수훈련을 3개월 동안 받게 하였고, 국내진입을 목전에 두었으나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조기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 주석은 그 실망감을 백범일지에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현재 대만정부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대일선전포고 원본에는 포고 일자가 12 10일이어서 지금까지 9일과 10일 양론이 분분하지만, 광복군동지회는 해마다 12 9일을 기념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大韓民國臨時政府 對日宣戰聲明書)

 

우리는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국, 영국,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 나라가 일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것을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를 재조하는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특별히 아래와 같이 성명을 한다.

 

1.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한다.

2. 1910년의 합병조약과 일제의 불평등 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장춘과 남경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 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대한민국 23 12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 석  김  구

 외무부장  조 소 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