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9일

이승복군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

산풀내음 2016. 11. 1. 20:41

1968 12 9,

이승복군 무장공비에 의해 피살

 

1968 12 9, 울진 삼척지구에 투입된 무장공비에 의해 9살 난 이승복군이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입이 찢겨진 채 무참히 살해됐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이튿날 10, 이를 특종 보도함으로써 이슈화됐다.

 

무참하게 살해된 이승복 가족들

 

1.21 청와대습격사건이 있던 1968 10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군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무장간첩들이 당시 속사국민학교 2학년인 이승복(당시 9)에게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 이후 발견된 이승복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다. , 무장간첩들에게 문자 그대로 끔살을 당했다.

결국 일가족 4명이 무참하게 살해되고, 36곳에 칼을 맞고 거름더미에서 발견된 형 이학관(당시 15),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와 할머니 강순길은 살아났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취재했는데, 조선일보가 이승복군 가족 4명이 북한 무장군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발단이 됐다는 특종 보도를 하게 된다.

이승복의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때 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유가족들 역시 "너무 지쳤다"며 논란에 휩싸이는 것보다 안식을 바란다고 한다. 2009 무장공비 120명 중에 한 명이었던 김익풍씨가 이승복 41주기 기념식에서 이학관씨 부부에게 사죄를 하기도 했다. 2014 8월 이승복 소년의 아버지 이석우 씨가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진위를 둘러싸고 30여 년에 걸쳐 안티조선 세력과 조선일보사간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은 이승복 소송으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와 이 김종배의 기사를 바탕으로 1998오보 전시회를 연 김주언의 기사가 발단이 되었다.

 

김종배의 경우 공산당이 싫어요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를 작성, 문제제기를 했는데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그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일보의 기사를작문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으나, 7년이 넘는 재판 끝에 2006 김종배는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조선일보의 기사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충분한 구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 고 밝혔다.

그러던 2002 9 3, 이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가 찍혔다. 무장공비에 의한 이승복군의 용기 있는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며, 이를 특종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의 기사는 소설이나 작문이 아니라사실 보도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조선일보사 내 자료실에서 발견된 당시 현장 사진 15컷과 승복군의 형 학관씨와 주민들의 증언이 큰 증거가 됐다.

 

결과적으로 대법원 판결에서 이승복 사건 자체는 실제 사건이라고 판결했으므로 진위 여부의 논란은 끝났다. 생존한 형 이학관이 수십 회 난자 당해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상당한 개연성을 부여 물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극화적 드립저널리즘 측면에서는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사건 자체는 분명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굳이 정리하자면 이승복이 당시 상황에서 북한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주장을 했고, 그것이 이 어린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이 소송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 전국의 초등학교 중 70~80%는 동상을 철거했으며, 이승복 기념관은 2004 강원육청소속에서 평창군교육청 소관으로 옮겨지며 통폐합이나 사회단체나 사단법인의 관리를 고려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졌다. 10년 뒤 정권이 바뀐 뒤에도 이승복 기념사업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 이승복 사건은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