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9일

서울대 문리대학보 논문 필화 사건

산풀내음 2016. 11. 1. 20:38

1957 12 9,

서울대 문리대학보 논문 필화 사건

 

1957 12 9일자 서울대 문리대학보 `우리의 구상`에는 `모색-무산대중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필자는 학생 유근일. 이 글은 한국 사회 성격을 분석하고, 소수 지배층과 광범위한 대중의 대립의 극복 방법으로 민주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논문의 맨 마지막에는 "무산대중은 단결하자" "새로운 조국을 갈구한다"는 결론도 들어있었다.

 

이 글을 읽은 이희승 학장은 즉각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관계 교수회의를 소집했다. 학보를 즉각 회수하라고 지시했으나 1천부 중 3백부는 회수할 수가 없었다. 학보 발행기관인 `신문연구회`는 즉각 해산되고 편집책임학생 2명은 무기정학 당했다. 필자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히 고려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5일 뒤인 12 14일 문교부 차관이 이 사건에 대해 기자들에게 답변하면서 `서울문리대에 좌익교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이 말은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그리고 이날 밤 유근일은 퇴학처분을 당하고 구속됐다. 학계와 언론계 등에서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 처사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문리대 구내에는 좌경 유인물이 붙었다. 유근일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결과는 무죄였다. 유근일은 4·19혁명 이후에야 복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은 그를 다시 교도소에 갇히게 했다.

 

판결은 문제의 글이 민주 사회주의에 기조를 둔 순수 학문 연구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당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사건에 대한 학교와 정부의 과잉 대응을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또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유 문제가 공론에 붙여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