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9일

소련 사하로프 박사 18일 만에 단식 중단

산풀내음 2016. 11. 1. 20:46

1981 12 9,

소련 사하로프 박사 18일 만에 단식 중단

 

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Dmitrievich Sakharov, 1921 5월 21 ~ 1989 12월 14) 박사가 1981 129일 유배지 고리키에서 벌이던 18일간의 단식투쟁을 중단했다. 사하로프는 소련 정부가 며느리의 미국행을 허가하지 않자, 자신의 인권활동 때문이라며 11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었다.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소련 내 인권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던 사하로프의 단식은 세계적 핫뉴스였다.

 

 

1921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26세 때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비범했다. 1948년 핵무기를 다루는 연구팀에 가담, 수소폭탄개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젊은 나이였던 32세 때 소련과학아카데미 사상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으며, 스탈린상을 비롯해 소련국민의 최고영예인 노동훈장을 3개씩이나 받기도 했다. 미국과의 핵무기 개발경쟁에서 뒤져 있던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그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적 존재로 부상했다.

 

하지만 냉전 체제에서 국가의 욕망과 개인의 양심은 양립하기 어려웠다. 사하로프 박사는 1961년 대기 중에서 100Mt(메가톤·1Mt TNT 100 t의 폭발력)급 열핵폭탄을 시험하려는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누구보다 방사성 낙진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사하로프 박사는 계륵(鷄肋) 정도였다. 소련은 그가 없는 핵물리학을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사하로프 박사가 1968년 세계열강의 핵무기 감축을 촉구하는 에세이집 ‘진보, 공존, 지적인 자유(Progress, Coexistence, and Intellectual Freedom)’를 서방세계에서 출간하고 2년 뒤 소련인권위원회를 창설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는 이미 물리학자에서 저항 운동가로 변해 있었다.

 

1975년 사하로프 박사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집요한 방해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소련정부가 그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시상식에는 그의 부인 엘레나 여사가 대신 수상했다이어 1980년 오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거하다 볼가 강변의 공업도시인 고리키로 강제 유배되면서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그는 유배 기간에도 4번이나 단식을 하며 고독한 투쟁을 벌였고,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에는 반체제 인사 석방과 인권 보장을 주장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3년 뒤 협심증으로 타계했다2001년 러시아의 여론조사에서 사하로프는 ‘20세기 러시아인가운데 레닌, 스탈린에 이어 3위에 올랐다.

 


Andrei Sakharov and Elena Bonner, prominent leaders of the Soviet human rights movement. Courtesy of the International Memorial Society.

Sakharov with a group of Soviet human rights activists,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