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2일

시안사변 (西安事變) 발발

산풀내음 2016. 11. 4. 21:58

1936 12 12,

시안사변 (西安事變) 발발


1. 장쉐량과 장제스의 인연

 

장쉐량(張學良)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 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는데 1931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은 장제스(蔣介石)에게 의탁하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의 부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고 당시 중국 공산당의 홍군과의 전투에는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와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좌익의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 난징정부의 "선 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하였다.

 

 

2. 장쉐량과 장제스의 갈등

 

1936년 당시 장제스는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한 채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하지 않고 직접 난징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였다. 그 해 10월 장제스가 직접 시안을 방문하여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다. 이에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의 항전을 거듭 촉구했으나 총통은 듣지 않았다. 11 21일 동북군을 대체하여 공산군 토벌에 나선 난징 국민당군 1군이 홍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군을 분쇄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졌다.

 

12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위해 시안에 도착하였다. 당시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의 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2 9일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 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 계획을 발표했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12월 11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였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시안사변 당시 장제스()와 장쉐량()




서안사변의 주역 장학량(동북군)과 양호성(서북군)

 

 

3. 장제스 총통의 체포

 

12월 12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장제스 총통을 새벽 3시에 급습을 통해 체포하는데 성공하는 등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직후 동북군과 서북군은 다음과 같은 8개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쑨원 박사의 유지(遺志)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요구 조건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 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4. 총통의 석방 및 제2차 국공합작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1897-2003)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 와 막후협상을 벌렸다. 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의 반대와 장제스의 8개 요구 사항에 대한 문서 서명 확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12월 25 석방하였다. 장제스의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개인적인 보장을 믿고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

좌로부터 장쉐량, 쑹아이닝(씅메이링의 언니), 위펑즈(장쉐량의 부인), 쑹메이링(장제스의 부인), 장제스.

 

장쉐량은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왔는데 그는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다. 12월 31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타이완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고,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후 국민당 정권 내 대대적인 '친일파' 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에게 4개항의 화평조건을 제안함으로써 수용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대표자 저우언라이등과 여러차례 협상하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인다는 약속을 하였다. 1937 7 노구교 사건으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 국공 합작을 이루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안사변 담판에 참여한 중국공산당 대표 들, 좌로부터 진헌방, 엽검영, 주은래

서안사변이 발생한 후 서안 각계 민중들 장학량, 양호성의 연합항일을 옹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