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2일

흥남철수와 메르디스 빅토리호

산풀내음 2016. 11. 4. 22:05

1950 12 12,

흥남철수와 메르디스 빅토리호

 

1950 12 12 6·25전쟁이 한창이던 이날 이른바 `흥남 철수`가 시작됐다. 6·25전쟁사에 기록된 `흥남 철수`는 이날부터 24일까지 흥남에서 12일간 벌어진 당시 최대규모의 철수작전을 말한다.

 

 

시작은 1950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총공세를 펴기로 하고 15,000명의 미 해병 1사단을 원산에 상륙시켰다. 이 부대는 북진 끝에 11월 하순, 함흥 북쪽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미 10월 하순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인 장진호에도 중공군 4개 사단 12만여명이 포진해 있었다.

 

미군이 중공군에 포위돼 공격을 받자 유엔사령부는 철수를 명령, 11월말 1사단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이 장진호 전투(Chosin Reservoir Battle·`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표기)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양쪽에서 발생했다. 미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 중공군 25,000, 미군 3000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탈출한 병사들은 흥남까지 철수했고, 연합군이 진격할 때 환영했던 민간인들까지 뒤섞여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흥남항에서 미 해병 1사단을 포함한 105000명의 지상군과 10만 여명의 피란민, 17500대의 각종 차량과 35t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193척의 군함으로 남쪽으로 탈출시킨 과정이 `흥남철수`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때 후송하지 못한 200t의 탄약과 같은 양의 폭약, 500개의 포탄, 200드럼의 유류는 최종철수 때 항만과 함께 폭파됐다.

 




UN군과 피난민 14,000명을 태우고 철수 후 흥남부두와 군수물자 폭파

 

흥남철수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를 성공시킨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의 레너드 라루 선장과 47명의 선원 이야기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 12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22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되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군대는 이미 철수했고 피난민의 철수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해안에 남아 있던 14,000명의 피난민 모두가 승선할 때까지 포화가 쏟아지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승선시켰다. 당시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는 선장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를 한명도 빠짐없이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14,000명 모두가 승선할 수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12월 24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1225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