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5일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산풀내음 2016. 11. 5. 19:41

1993 12 15,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1993 12 15일 오후5시 제네바. 세계각국의 무역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우루과이라운드(UR, Uruguay Round of Multinational Trade Negotiation) 협상이 7년여간의 난항끝에 117개 국가가 참가한 가운데 타결됐다. 회의장을 나선 브리튼 당시 EC(유럽공동체)무역담당 집행위원은 "오늘은 세계무역사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각국 대표들 대부분의 표정은 무거웠다.

 

 

1986년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에서 UR협상 출범을 선언한지 73개월이 흘렀고, 그 시간만큼 지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역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시장개방을 강요하는 선진국에 맞서 어떻게 자국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1994 415일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열린 각국간의 각료급 회의에서 최종협정문이 조인됨으로써 UR은 완전 타결되었다.

 

At left, GATT Director-General Peter Sutherland holds the “Final Act” of the Uruguay Round. Right, U.S. Trade Rep. Mickey Kantor signs the Final Act of the Uruguay Round, April 15, 1994.

 

제2 세계 대전 후반인 1944 뉴햄프셔 브레튼 우즈에서 있었던, 브레튼 우즈 회의(미국 달러화를 기축 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와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 제도로 특징 지워짐)의 결과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창설되었다. GATT는 양자조약 (兩者條約)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리고 GATT "무조건 최혜국대우 공여원칙"에 의거하고 있다. 이는 다자간 교역규범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비차별성을 강조한 것으로, 가장 혜택을 입는 국가에 적용되는 조건이 모든 다른 국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GATT에 참여한 국가는 때때로 모든 국가가 참여할 새로운 무역 협정을 의논하게 된다. 그러한 매번의 협정 과정을 "라운드"라 한다. 1947년 제네바 라운드를 시작으로 총 8 차례의 라운드가 있었다.

 

 

UR은 제8차 협정이었다. UR 협상이 추진된 배경은 1980년대에 들어 세계경기가 제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장기간 침체를 보인 데다,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 등으로 세계경제의 불균형 현상이 심화되면서 세계교역질서가 보호주의에 휩싸이게 되어 GATT 체제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특히 GATT에서 벗어난 각종 조치의 남발, ()덤핑·상계관세의 남용 등이 GATT의 위상을 위축시켰고, 경제블럭화가 진전되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우려되었다. 또한 경제의 서비스화 진전에 따른 서비스 교역의 중요성이 커지고 지적재산권 보호를 둘러싼 마찰이 증가함에 따라 이를 규제할 새로운 국제규범에 대한 요구가 미국, EU 등을 중심으로 증대되었다.

 

이전의 7차례의 다자간 무역협상이 선진국간의 관세 인하에 초점을 맞춘 데 비해 우루과이 라운드는 보다 다양한 이슈를 포괄적으로 다루려고 하였다. 섬유, 농산물, 반덤핑, 긴급수입제한조치(safe guards) 등 개도국의 주요 관심사항이 협상의제에 포함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서비스/지식 시장을 무역자유화하려 하였다. 또한, GATT의 기능을 강화하여 보다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국제기구로 확대, 강화하려 하였다. 우루과이라운드는 참여국가들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협상 기간이 연장 되었다. 그러나 국가들은 우루과이 라운드가 실패할 경우 세계경제권의 급속한 블록화와 보호주의의 만연의 상황을 우려하여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특히 농산물 협상은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87 2월부터 본 교섭에 들어간 15개 협상그룹 가운데 하나로, 서비스 부문과 함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인 동시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분야가 농산물협상이었다. 농산물협상은 각 나라가 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특성과 협상 당사국 사이의 기본적인 시각차이로 인하여 협상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협상의 주요 의제로는 국경보호조치의 완화, 농업보조금의 감축, 수출보조금의 감축 내지는 철폐, 식품 위생 및 동식물 검역 기준의 설정 등이며, 여기에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과 개발도상국에 대한 우대조치를 어느 정도 반영시키느냐는 것이 주요 관심사항으로 되어왔다.

 

1990 7월 미국의 입장을 주로 반영한 초안이 의장 직권으로 제출되었고, 1991 7 G7(선진7개국) 정상들이 이를 ‘협상 촉진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농업의 국내보조 및 시장접근 부분 등에 관한 협상에서 협상당사국 사이에 감축목표 및 감축기간, 관세화 대상품목 등을 놓고 좀처럼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92년 타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쌀을 포함한 285개 농산물의 수입개방을 합의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농민시위는 협상이 끝난 1994 4, `UR밀실협상 규탄 및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11개 도시에서 열려 농민 3만명이 참가했을 정도였다.

 

 

UR가 완전 타결되면서 GATT는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에 자리를 물려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GATT가 스위스 제네바에 작은 사무국을 두고 운영된 느슨한 `국제협정`이었던데 비해, 1995 1 1일 출범한 WTO는 제네바 본부에 수백명의 전문가를 상주시키고 무역분쟁을 조정하고 회원국들의 의무 위반을 감시하는 `국제공식기구`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