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6일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 보스턴 차 사건 발발

산풀내음 2016. 11. 6. 07:36

1773 12 16,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 보스턴 차 사건 발발

 

1773 12 16일 밤, 인디언으로 가장한 150여명의 괴한들이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인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3척을 급습, 배에 실려있는 324상자의 인도산() ()를 바닷속에 내던졌다.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 the Destruction of the Tea in Boston)’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현미경으로 보면 영국의 차()조례에 반발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소행에 불과하지만역사라는 망원경으로 보면 미국 독립전쟁을 향한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5 - 1763)에 있다.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에 칠년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오하이오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영국프랑스식민지 쟁탈 전쟁이 발생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영국 측에서 볼 때 프랑스가 인디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의 결과, 영국은 북미 식민지 전쟁의 참전국 중 가장 큰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는 미시시피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동맹국 스페인에 할양했으며, 이는 스페인이 패전으로 플로리다를 영국에 할양한 대가였다. 스페인은 영국에 플로리다를 할양한 대가로 쿠바의 아바나를 손에 넣었다. 카리브해에서 북쪽 프랑스의 식민지는 생피에르 미클롱 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쪽 절반의 식민지 세력의 지배를 굳혔다.

 

그런대로 순탄했던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 관계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결과에 따른 영국의 북아메리카의 동쪽에 대한 지배권 강화와 더불어 7년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영국이 식민지에 관세를 강화하고, 그동안 묵인해주던 밀무역을 단속하면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영국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로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직접세를 부과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1764년 설탕조례를 제정하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를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라는게 법안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1767년의 타운센드법안이다.

 

각 식민지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는데, 특히 북미 동부지역의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들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직접 참전했고, 7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함께 싸웠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전리품이나 영토를 보상 받지도 못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세금이냐며 격분했다. 반대로 영국인들은 우리는 북미지역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와 카리브해에서도 싸웠는데 그 정도 고통 분담도 못해주냐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차조례(Tea Act)가 또 제정됐다. 1773년 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이른바 “차조례(Tea Act)”는 사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미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홍차에 무리한 세금을 부과”한 게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가격을 낮춘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원래 동인도회사로부터 정식루트를 거쳐 수입되는 홍차가 아니라, 네덜란드로부터 밀수되어 들어오는 홍차를 비싸게 유통시키는 영국 본토와 식민지의 유통업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안으로, 낮은 관세의 차수입 독점권을 동인도회사에게 주어 회사를 회생시킬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홍차를 즐겨마셨던 미국소비자들에게는 홍차가격이 예전에 비하여 저렴해 지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식민지인들의 입장에서는 울고싶은 사람에게 뺨을 때리는 격이 됐다.

 

다만, 이 법안으로 두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그 하나가 부유한 사업가(밀수업자, 유통업자 및 관련 부랑배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식민지에 관련된 법안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점에 대해 당시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점이었다.

특히 1773년 이전까지의 북미지역의 식민통치는, 영국의회와 식민지의 각 대표들이 함께 모여 사안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식민지 출신이라 해서 특별히 차별대우를 받지도 않았고, 영국의 주요 공직이나 군의 요직에 진출하거나, 지식인으로써 학계에 진출한 사람들도 다수 존재했다.

 

마침내, 1773 12 16, 홍차 수입업자들은 불량배들을 데리고 인디언 원주민으로 “분장”해서 보스톤 항구에 정박해있는 홍차를 실은 배에 다가가 총을 쏘고 방화를 하며 홍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774, 영국은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보스톤 항을 폐쇄해버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메사추세스의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고, 보스톤에서 잃은 손실액을 메사츄세스 자치령에서 변상할 때까지 보스톤 항에서의 모든 활동도 금지시켜 버린다. 오히려 시민들은 이 사태로 인하여 폭등해 버린 홍차가격에 절망했고, 저렴하게 마시지 못하게 된 것에 격분했다. 이 사태를 초래한 기업가들과 중간 유통 상인들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팔매를 피해 다녀야 했다.

 

죠지 워싱턴은 홍차를 바다에 쳐넣은 무리들을 북미인들의 수치라고 맹비난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민들에게 영국에 홍차 값을 변상해 주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벤자민 프랭클린과 시민들은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1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하여 영국 의회에 전달한다.

 

그러나. 7년 전쟁 이후 잦아진 식민지 대표들의 불만표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영국의회가 이를 거절해 버린다. 영국은 그동안 느슨하게 통치를 해왔던 정책을 버리고 북미식민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직접통치로 전환할 생각을 품게 된거다.

1774년의 보스톤 항 폐쇄는 미국의 다른 항구도시에서 보스톤 차사건과 유사한 성격의 폭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에 맞서 영국은 항구 폐쇄 및 지자체 정부들의 해산으로 대응한다. 뉴욕, 애나폴리스, 찰스턴,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리아나 등. 사태는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고, 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이를 원만히 해결해보려 영국에 서한을 보내거나 직접 방문을 했던 북미의 지식인들은 모두 말 그래도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고, 결국에 1774 9, 50명의 식민지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가졌고, 급기야 1775 4월에는 보스턴 교외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무력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메리카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