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16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발효 (국민방위군 사건의 태동)

산풀내음 2016. 11. 6. 08:01

1950 12 16,

국민방위군 설치법 발효 (국민방위군 사건의 태동)

 

1950 11월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계선까지 진격하여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다급한 후퇴가 시작되었다. 한국군으로서는 개전 당시에 이어서 두 번째 후퇴였다. 인민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한강다리까지 폭파해가며 서울 시민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던 이승만 정권이 다시 후퇴 길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숱한 남쪽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또 나이가 든 사람들은 전쟁물자 수송 등에 동원되었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이승만 정권의 요인들은 서울은 다시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군에 가용한 인적 자원만큼은어떤 일이 있더라도빼앗기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일념이 실천에 옮겨졌을 때 그어떤 일은 상상을 초월한 비극으로 번져갔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1950 1215,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12 16일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수십만의 장정을 동원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예산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통과시켰을 정도로 준비가 매우 허술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당시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관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사실 김윤근은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은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신성모의 사위였다.

 

전세계를 통틀어 최악의 국방부 장관인 신성모()와 장인 덕에 하루 아침에 민간인에서 별을 달게된 김윤근. 이들 뒤에는 상납의 고리로 연결된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면서 이 부대의 운영을 사설단체에 불과한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에 맡겼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은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진 것은 이승만 정권 수립에 행동대 역할을 해온 우익반공청년단체들이 준군사단체 또는 정식군대로 발돋움하려는 오랜 소망을 전쟁 중에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했다. 1948년 국방경비대의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우익청년단체를 국군의 기간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우익청년단체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난립해 있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년 뒤에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청년방위대는 사설단체였지만, 한국전쟁 발발 중에는 국가기구를 대신해 모병과 후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이 국민방위군이 창설되자 그대로 그 지휘부를 맡아 마침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테러집단이었던 우익청년단체 간부들에게 국가권력과 예산을 대주고, 이를 감독조차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없다.

 

 

12 21일에 첫 부대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된 것을 시작으로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무려 50만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으긴 했으나, 중공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게한다.

 


소집된 국민방위군

 

 

1) 죽음의 행렬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하느냐였는데, 이들 50만 명은 걸어서 추운 혹한 상황속에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보급과 겨울피복 및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당시 국민방위군 작전처장이었던 이병국(李炳國)의 증언에 따르면 1만명 가까운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한톨 군복 한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대신 국민방위군에게는 양곡권이라는 것이 지급되었다. 행군 도중에 대열 책임자가 이 양곡권을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성모의 국방부와 조병옥의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양곡 지급이 안 되고 내무부는 각 시장 군수에게 양곡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국민방위군에 자원입대한 서태원(徐泰源, 5대 민의원·작고)은 의용군 시절에는 주먹밥이나마 하루 세끼를 거른 적이 없지만, 국민방위군으로 남하할 때는 병자나 아사자가 속출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거지 중의 상거지로서, 다만 끌고가고 끌려가야 하는 슬픈 행렬이었다고 회고했다.

 

엄동설한에 길을 나선 국민방위군 병사들의 의복사정은 더욱 비참했다. 장정들은 아무리 예비군이라지만 정부의 책임하에 소집된 이상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기에 어차피 벗어버릴 민간복을 껴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갔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피복비를 전혀 계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다. 그런 형편이니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체온과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뿐이었다. 학교 교실에서라도 숙영할 때는 교실 하나에 200300명씩 처넣으니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다.

 

 

 

2) 사망자 수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인해 100여일 사이에 전투에 참가는커녕 도 못 만져본 장병 수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 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엄청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명 가량의 군인들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천수백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만명 내지 10만명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돼 있다. 노무현 정권에서 조직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사망자 5~8만명 추산하고 있다.

 

 

3) 고위간부들의 예산 유용

 

국민방위군 예산은 1951 1 30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방위군 총인원을 50만 명으로 추산하여 3개월분 총 209억 원을 책정하였지만 1인당 배당액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실제 예산이 배당되는 과정에서 생긴 국민방위군 간부들의 횡령에서 발생했다.

 

본래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다. 즉 국민방위군 병력을 약 50만 명으로 잡으면 1개 교육대당 1만 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었는데, 그러나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돌려차기'식으로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김해로 가라 하고, 김해의 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하고, 진주의 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고 하는식의 수법으로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빼돌려 부정 착복, 공금횡령을 저질렀던 것이다. 나아가,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횡령하거나 부정 착복해서 빼돌린 돈으로 장부상으로 '병사들을 위해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윤익헌이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은 무려 3억원. 그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 1년 예산이 3천만원가량 될 때였다

 

비리의 주역들인 국민방위군 간부들

국방장관 신성모, 사진 오른쪽 마이크 잡고 있는 놈

 

 

4) 비리에 대한 제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곳곳에서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참혹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것이 목격되고 곳곳에서 소문이 나타났다.

1951 임시수도 부산에 도착한 국회의원 이철승에게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착복한다는 첩보를 입수, '국민방위군 비리 의혹'이 제보되었다. 우연히 국민방위군에 속해있던 친구를 만나게 된 그가 아사 직전인 친구의 사연을 듣고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의혹을 제기했는데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5) 사건에 대한 처벌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참사의 최종적 책임이 이승만에게 돌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집요하게 수사를 방해하지만, 들끓는 여론 때문에 처벌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둘러 구성된 군사법정을 통해서 재판 개시 3일 만에 김윤근(신성모의 사위)에게는 무죄가, 윤익헌에게는 징역 3 6개월을 선고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여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을뿐이다.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으며 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윤보선은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에게 신성모김준연 및 국방부,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외 방위군 간부들의 처벌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비들의 술책이라며 현혹되지 말라고 대응하였다. 즉 이승만은 사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고 이를 계기로 윤보선은 이승만과 결별하게 된다.

 

국회는 1951 4월 30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이와 관련된 부정착복한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국민방위군은 5 12일 해체되었고, 7월 19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 12 야산에서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언, 박기환 등에 대한 공개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이들이 착복한 막대한 자금이 정치권세력, 특히 이승만지지 세력에 흘러들어간 정황증거를 포착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너무 일찍 처형되는 바람에 결국 숱한 의문을 남긴 채 사건은 종결된다.

 

공개처형 당하는 국민방위군 간부들, 이때 이승만도 처형을 했어야 하는데 ㅠㅜ

 


 

슬픈 사연 하나, 국민방위군 아흔 다섯살의 아내

 

국민 방위군으로 징집되간 남편을 기다리며 아흔 다섯살의 처가 아직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며눈물로 살아가고 있다. 인천에 살고 계신 김 할머니는 남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1951 6.25 전쟁중에 국민 방위군으로 징집되어간 남편은 1999 6 25일에야 국방부로부터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국가 유공자 지정은 물론 안됬을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없다.

 

6 25일은 남편의 제삿날이다. 그러나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한다. 이때 징집 되어간 남편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 애타게 기다리며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김할머니는 남편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국가 유공자도 아니고,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일평생을 살아온 김할머니는 눈물겨운 목소리,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으로 이렇게 말한다.

 

"전사통지서를 6 25일자로 정부로부터 받았으니 정부가 전쟁당시 징병으로 인해 군에서 사망한 것을 인정한 것인데 아직도 국가 유공자는커녕 정확한 해명도 해주지 않고 있다.

나 죽기전에 남편의 정확한 사실과 국가로부터 명예를 회복 받고싶다. 그래야 자식들한테도......."

 

흐르는 눈물이 말문을 막는다. 한참을 참고 계시던 아흔 다섯살의 김 할머니는 끝내 더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인천방송국, 2009.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