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5일

대연각호텔 화재

산풀내음 2016. 11. 13. 09:11

1971 12 25,

대연각호텔 화재

 

1971 12 25일 오전 9 50, 대연각호텔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날 화재는 2층 커피숍의 프로판 가스 취급 부주의로 가스통 폭발하면서 발생하였고 닥트와 엘리베이터 통로를 따라 금새 건물 전체로 번졌다서울 중부소방서가 긴급 출동한 10 17분 무렵 불은 이미 21개 층 전체를 삼키고 있었다. 화재를 견뎌냈어야 할 비상계단에 쌓여 있던 가연 물질에 불이 옮겨붙어 겨울의 강풍을 타고 퍼진 탓이다. 계단은 독성 가스와 화염, 열기로 가득 차고 투숙객들은 대피 수단을 찾지 못했다. 옥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은 닫힌 철제문 앞에서 타 죽었다.



화재현장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종필 국무총리,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 신민당 당수 김홍일 등이 나와 있었고 박 대통령은 “모든 장비를 동원하여 진화작업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박종규의 진두지휘아래 대통령 전용 헬리콥트까지 동원되어 인명 구조를 하였다,

 

그러나 소방대와 군, 미군의 헬기까지 동원되었지만 접근이 어려워 구조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위로도 아래로도 출구가 막혀버린 상황에서 투숙객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투신으로 사망한 38명을 포함해 모두 163명이 숨진 대연각 화재 사건은 화재 발생 8시간 만인 오후 5시 30분쯤 불길이 잡혔다. 이날 화재는 세계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초대형 화재의 기록을 남겼다.

 

재앙은 예고된 것이었다. 허가된 20층을 초과해 한 층을 더 올리고도 막판에 건축법 제한이 풀려 준공 검사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사고가 일어났다. 스프링클러는 물론 방화벽도 없었다. 엉터리 준공 검사에도 처벌은 호텔 사장과 지배인에 그쳤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데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는 인식은 서울 시민회관(1972년, 사망 51명), 청량리 대왕코너(1974년, 사망 88명) 등 잇따라 일어난 대형 화재에도 별반 사라지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대형건물에 스프링쿨러 화재진압 시스템이 의무 설치되고, 고층건물 옥상에 헬리패드 의무 확보가 시행되었다.

 

한편 대연각호텔 화재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재무부는 화재보험금 지급방침을 세웠으며 국세청에서는 이 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던 호남정유(현 GS 칼텍스), 호남전기 등 8개 업체에 대해 소득세, 법인세, 영업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이 화재로 인해 건물 대표를 비롯하여 10여명이 구속되었으며 사건은 국회에까지 번져 논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