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2월/12월 25일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총살형

산풀내음 2016. 11. 13. 09:22

1989 12 25,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총살형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대통령과 부인이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1989 12 2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비밀경찰을 이용해 완벽한 언론통제를 했고 부인을 제1부수상으로 하는 등 권력을 남용해왔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şescu, 1918 1 26 ~ 1989 12 25) 1918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년대부터 공산당 활동에 돌입했으며 감옥에 있을 때 만난 역시 공산당원인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데지(Gheorghe Gheorghiu-Dej, 1901~1965)를 만나 그의 심복이 되었다. 그는 1947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행정관료가 되었다. 스탈린주의를 신봉하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게오르기우 데지의 심복으로 알려졌던 그는 곧 당서열 2위가 되었다. 1965 3월 게오르기우 데지가 죽자 당의 지도자직을 계승하면서 국가수반이 되었다. 1974 3월에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을 겸임하면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데지(Gheorghe Gheorghiu-Dej, 1901~1965)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데지를 밀착해 보필하는 차우셰스쿠. 글고 그 옆에 소련의 후루시쵸프.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때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우상화작업을 시작한 상태였고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사회가 획일화된 상태였다.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은 그는 이에 감명을 받고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사회를 획일화시키는 작업을 단행했다. 그는 자신을 '지도자', '카르파티아의 천재'라고 칭하고 아내에게는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칭호를 주는 등의 개인 우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김일성과의 만남

마오쩌둥과의 만남. 김일성의 만남에 비해 다소 형식적인 듯한 분위기.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단행하고 사회를 원활히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감시 정책을 펼쳤다. 인구가 2천만인 나라에 설치된 도청기가 300만개에 도청 센터는 1000여 개에 달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거기에 고아들을 모아 결성한 비밀 경찰 조직 세쿠리타테를 만들었는데 차우셰스쿠는 군대보다 이들을 더 우대했으며 이들로 하여금 국민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차우셰스쿠 우상화 포스트

 

차우셰스쿠는 엄청난 족벌 정치를 행했다. 장남인 일리에를 후계자로 만들어버리고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삼았으며, 차남은 비밀 경찰 총 책임자. 삼남은 국가경제기획원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 엘레나는 공산당 서열 2순위였다. 거기에 동생들이 경찰 책임자, 국방부 차관 등을 차지했고 며느리는 학생 친위대 책임자, 그 외에도 수많은 친척들이 주요 요직들을 독점했고 차우셰스쿠 자신도 수많은 요직을 직접 차지했다.

 

왼쪽부터 발렌틴, 엘레나, 니쿠, 조이아, 차우셰스쿠 등 가족사진.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격한 통제와 세뇌에도 루머를 통해 차우셰스쿠 가족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발렌틴과 부모와의 갈등, 조이아 사건, 니쿠의 음주운전, 중매결혼 실패 그리고 나이트클럽 여급과의 추문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차우셰스쿠는 인구=국력이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인 출산율 늘리기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낙태와 피임을 금지시켰다. 효과가 안 나타나자 40세 이하의 여성은 무조건 5명 이상의 아이를 낳도록 하고, 자식의 수가 5명보다 못하면 엄청나게 무거운 세금을 때렸다. 그리고 이웃나라로 가서 낙태하려는 여성들이 속출하자 국경에서 쏴죽이는 짓을 벌였다.

 

차우셰스쿠는 정말로 호화롭기 그지없는 인민궁전(The Palace of the Parliament) 1983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궁전 건설 지구에서 강제 철거가 자행된 건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궁전 내부의 장식이 참으로 호화로웠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모든 건축 재료는 루마니아의 국산 재료를 썼는데. 3,500 여 톤의 수정, 480개의 샹들리에, 1,409개의 천정용 전구와 거울을 만들었고 70톤 이상의 철과 청동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목재가 들어갔는데 그 중 95% 이상은 루마니아산이었다. 거기에 20만 제곱미터의 양모 카펫과 문직으로 짠 커튼, 금은으로 장식된 벨벳 등이 있었고 방의 개수는 1000여개에 달했다. 이것이 끝이 아닌게 집무실과 연회장은 모두 대리석으로 꾸몄고 벽, 천장, 심지어 화장실도 금을 도금하는 식으로 치장을 했다. 거기에 저격수의 사거리까지 계산되어 자신이 저격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루마니아 인민궁전 (차우셰스쿠의 아방궁)

 

1989년 동구권에 불어닥친 자유화 물결에 루마니아도 독재타도와 민주화을 요구하는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1989 12 17일 챠우셰스쿠는 티미쇼아라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할 것을 군대에 명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시위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란을 방문 중이던 차우셰스쿠는 급히 귀국하였다.

 

루마니아 역사의 현장, 티미쇼아라

 

12월 21 12 30, 차우셰스쿠는 시위 사태를 진정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지하는 관제 대회를 열어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군중 10만을 모이게 하고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연설의 내용은 경제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을 지지를 해야하는 이유뿐인 내용에 불과했는데 이 관제 대회에서 뒤쪽 끝에 있는 젊은 시위대가 갑자기 야유하자 앞에 있는 군중이 조금씩 야유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모든 군중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야유한다. 이 장면까지 전부 생중계되고 말았다. 얼마 못가 군중은 차우셰스쿠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돌변하였고 차우셰스쿠 내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중앙위원회 건물로 대피하였다.

 

 

차우셰스쿠는 경찰만으로는 안 될 듯하다고 판단해 정규군을 출동하게 했으나 그 정규군은 오히려 시위대에 가담한다. 원인은 평소 세큐리타테만 편애하는 것에 대해 평소 반대파인 군부는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감을 단단히 품던 군부는 시위 진압에 미온적이었고, 더군다나 시위 진압을 반대하던 바실리 밀레이 국방장관이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폭증하였다. 군인들은 이 날부터 시위대에 하나 둘 합류하기 시작했고 군대가 합류한 시위대는 속속 부큐레슈티의 대부분 지역들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2 22일 국영 루마니아 방송을 장악하고 자유 루마니아 방송으로 개칭하는 한편 공산당 관저까지 장악했다.

 



 

거기에 부인 엘레나의 추천으로 시위를 진압하라며 임명한 신임 국방장관 빅토르 스탄굴레스쿠는 처음엔 국방장관이 안 되려고 꾀병을 부리더니 나중에는 정규군에게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지 말고 원대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를 시위대로 합류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대령 이상의 고위장교까지 포함된 정규군이 시위대에 대대적으로 합세해버리면서 전세는 급격히 시위대 쪽이 유리해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도주하기로 했다 (단 리비아, 소련 중 한 곳으로 도주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이를 위해 그는 다량의 헬기를 관저로 불러들였지만 단 1대만 도착하였고, 자신의 부인과 경호원 등 소수만을 태우고 12 22일 도망쳤다.

그러나 헬기 조종사 빅토르 마우탄 중령은 더 이상 차우셰스쿠와 연관되기 싫었고, 헬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대공사격을 받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차우셰스쿠는 별수 없이 헬기를 포기하고 육로를 통해 외국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빅토르 마우탄 중령은 차우셰스쿠가 육지에 내리자마자 도망쳤고, 이 후 차량 탈취를 통해 도주를 하려고 하였지만, 첫번째 차량의 운전자는 엔진이 과열됐다며 얼마 못 가서 차우셰스쿠가 내리게 했고, 12 23일 두번째 운전자는 차우셰스쿠를 태워준 후 어느 도시의 농업박물관으로 데려가서 현지 주민들과 짜고 그를 감금시킨 후 시위대에 넘겨주었다. 그렇게 차우셰스쿠는 민중들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다정했던 시절의 차우셰스쿠 부부()와 체포되어 불안에 떠는 부부 모습()

 

당초 차우셰스쿠 부부는 형사 재판으로 심판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국 전선 위원회는 반군으로 저항한 세큐리타테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차우셰스쿠를 형사 재판으로 처리했다가는 전세가 역전되어 역으로 자신들이 재판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거기다가 미군이 차우셰스쿠를 구출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헝가리와 소련이 루마니아 정국 안정을 위해 군대를 보내겠다고 루마니아측에 제의하면서 구국 전선 위원회는 한껏 자극돼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체포 전에 군사재판으로 사형시켜버리기로 하였다.

 

문제가 있는 재판이기는 하였다. 그리고 실제 진행 과정도 그랬다. 일단 변호인측은 차우셰스쿠에게 정신 이상으로 밀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차우셰스쿠에게 거부당했다. 그러나 변호인측의 변호 노력은 그게 고작이었다. 아니.. 오히려 변호인이라는 사람이 검사가 되었다. 변호인이 법정에 자신이 보호해야 될 사람들의 사형 선고를 요청했다. 물론 원래 있던 검사도 마찬가지로 사형을 구형했다. 당시 검사의 발언이 일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 나는 너희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사형 집행장. 구국 전선 위원회는 차우셰스쿠를 죽이기 위해 8명의 병사들을 차출한 후 그들에게 차우셰스쿠 죽이는 데 자원할 사람을 물었다. 그리고 전부 손을 들었다. 결국 대위 1, 상사 1, 하사 1명이 각각 선발되었다. 보통 총살형은 집행하는 사람의 죄책감을 덜고자 공포탄과 실탄을 섞는 게 보통인데, 이 경우 저 3명은 1인당 30. 90발 전부를 실탄으로 장전했다. 결국 차우셰스쿠 부부는 총알 90발을 맞고 죽었다.

 

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차우세스쿠의 일생



'역사속에 오늘, 12월 > 12월 25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베리아 철도 전철화 완공  (0) 2016.11.13
대연각호텔 화재  (0) 2016.11.13
독립협회 강제 해산  (0) 2016.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