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18일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 개최

산풀내음 2016. 11. 25. 22:13

19191 18,

파리강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 개최

 

1914 6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15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채 1918 11 11일 정정협정이 체결되면서 끝이 났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 1 18일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열렸다. 파리 강화 회의의 명목상 목적은 미국의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이 1918 1 8일 미국 의회 연설에서 선언한 1차 세계 대전 이후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한 14개조 원칙에 대한 협의였지만, 실질은 승전국의 이해와 패전국에 대한 응징이었다.

 

파리강화회의

 

14개조 가운데 앞의 4개조는 공개적인 평화회담 개최,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항행의 자유 보장, 장애물 없는 동등한 통상 조건 수립, 국내 질서 유지에 필요한 군비 축소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5조부터는 식민지의 조정과 영토 조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하며 영토 조정을 해야 한다는 민족 자결주의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민족 자결을 적용한 국가가 유럽에 국한되었고,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의 해체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회의는 처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5개국에 의해서 진행됐으나 일본의 무성의와 이탈리아의 철수로 결국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등 3거두에 의해 주도됐다.

 

파리강화회의 당시 4대 승전국의 정상들.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회의에는 패전국의 출석이 허가되지 않았으며 소규모 국가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회의를 통해 국제연맹 규약과 베르사유 조약 등 5개의 평화조약 체결되었다.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렸던 날과 같은 날인 6 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패전국 독일을 상대로 베르사유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이어서 9 10일의 생 제르망 앙 레이 조약(패전국 오스트리아), 11 27일의 뇌이 조약(패전국 불가리아), 1920 6 4일의 트리아농 조약(패전국 헝가리), 그리고 1920 8 10일의 세브르 조약(패전국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체결되었다. 세브르 조약은 1923 7 24일 로잔 조약으로 대체됐다. 이 다섯 개의 평화조약이 만들어낸 국제 체제를 베르사유 평화 체제라고 부른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은 전범조항과 엄청난 배상금을 규정해 독일인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심어 주었다. 조약에 따라 독일 주민과 영토는 13%정도 축소됐고 600만 명의 인구를 빼앗겼다. 군 병력도 대폭 감축돼 공군은 해체됐고,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됐으며 해군의 군함 보유량도 10만 톤 이내로 묶였다. 배상금액은 독일인들이 꼬박 3년간 빵 한 조각 먹지 않고 일해야 겨우 모을 수 있는 1,320억 마르크로 결정됐다.

 

베르사유조약

배르사유조약 체결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인정받고자 했던 여러 민족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들을 지배했던 제국들의 승패 여부였다.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민족들은 당당히 독립을 인정받았다.

따라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아르메니아 등은 독립국이 됐다. 쿠르드족()의 나라 쿠르디스탄도 세브르 조약 당시 지도상에 표기됐지만 로잔 조약에 의해 부정됐다.

 

대한제국을 강점했던 일본 제국은 승전국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제국은 ‘세계 5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다신한 청년당은 1918 12월에 ‘조선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였고, 이듬해에는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국제 문제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김규식은 3월에 파리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부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였다.


한편 이승만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했다.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하고 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출신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체류 중이던 이승만은 미국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고 결국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임시 정부 대표단과 한국 공보국 직원들, 앞줄 맨 오른쪽이 김규식 선생

 

1912년에 수립된 중화민국도 참전국이자 승전국의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윌슨 대통령과 외교 담판을 벌인 중국 외교관 웰링턴 쿠(Wellington Koo, 중국명 구웨이쥔·顧維鈞)를 비롯한 대표단 60명은 파리 중심가의 고급 호텔 루테티아(Lutetia)를 거점으로 일본과 ‘외교전’을 벌였다.


중화민국 대표단은 독일 식민지였던 산둥반도의 이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에 반대하며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 제르멩 앙 레이 조약에는 서명함으로써 국제연맹 창립 회원국이 됐다. 이로 인해 신생 중화민국의 외교적 대표성도 크게 신장됐다. 더불어 몽골 일부를 제외한 청()의 영토 전체에 대한 한족(漢族)의 계승권도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