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18일

독도에 한국영토표지 설치

산풀내음 2016. 11. 25. 22:44

19541 18,

독도에 한국영토표지 설치

 

독도 영토 분쟁은 1952 1 28일 일본이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일본은 6·25전쟁으로 한창 혼란스런 한국의 사회분위기를 틈타 1953 6 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에 걸쳐 미군기를 도용하면서 독도에 상륙, 1948 6월 미군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어부들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 영토 표지를 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독도폭격사건은 1948 6 8일 처음 발생하였다. 독도에 국적 불명의 비행기 몇 대가 출현하여 폭탄을 투하한 뒤, 기관총까지 가하고 사라졌다. 당시 독도에서 고기잡이와 미역 채취를 하고 있던 울릉도와 강원도 배의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고, 20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이 침몰하거나 파손되었다. 생존자들은 다음날 6 9일 독도로 출어 나온 어선에 의해 구조되고, 전날 있었던 이 놀라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생존자들은 “7일 독도에 도착해 미역을 따고 있었고, 이튿날 8일 오전 1130분께 정체 모를 비행기 6대가 날아와 어선으로 10여 개 이상의 폭탄을 던졌다고 전했다. 폭탄이 터지면서 일어난 파도로 어선은 침몰 됐고, 당시 부근 해상에는 약 20~30척의 어선이 있었다”. “결국 발동선 2척과 전마선 2척이 겨우 귀환했다같이 간 일행 중에는 행방 불명된 자가 2명이며, 김동술(39)씨는 기관총의 탄환을 맞고 사망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십수 명이라 보도 됐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30여 척의 배에 200여 명의 어부가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미 공군 측 자료에 따르면 1948 68일 독도에 폭격훈련을 한 부대는 미 공군 93 폭격비행대대(93rd Bombardment Group). 328, 329 그리고 330 비행대로 구성된 제93 폭격비행대대는 1948 B-29 초공요새 폭격기(B-29 Super Fortress)들의 비행임무를 수행했다93 폭격대대는 캘리포니아주 메르세드 근처에 있는 캐슬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제15공군에 소속된 폭격비행대대이지만, 1948년 4월15일 3개월간의 임시배치명령을 받고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 배치됐다.

 

당시 미 전략 공군사령부는 B-19로 이루어진 비행대대의 전반적인 전시대비체제 점검을 위해 폭격대대 순환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다. 사건발생 당시 일본에 주둔한 유일한 B-29 운용 부대인 93 폭격비행대대는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서 21차례에 걸쳐 폭격을 실행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극동공군 사령부가 독도를 폭격 목표로 사용하도록 하달된 명령은 21차례에 걸친 폭격임무 중 3번째 임무였다.

 

3번째 출격에 대한 보고서에는 “1948 6월 7일 폭격임무 명령을 받았으며, 그 폭격 명령의 첫 번째 목표는 독도(Liancourt Rocks)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 폭격 명령은 독도를 최우선 폭격목표로 지정하고 각 B-19 마다 개당 1천 파운드(453kg)에 이르는 범용 폭탄을 4개씩 독도에 투하하고, 다른 두 곳은 카메라로 촬영하라는 훈련명령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독도가 미 공군의 폭격 연습지로 지정된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지만, 미군이 어선을 보고도 훈련을 감행하였는지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하여 미국 극동항공대 사령부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발표하였고, 독도에 대한 폭격 연습을 일체 중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독도를 폭격한 비행기와 같은 기종의 B-29

1948 68일 영문도 모른 채 숨져간 어민들의 넋을 기리고자 1950 68일 조재천 경북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625동란을 틈타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파괴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 독도가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2160호에 의해 폭격 연습지로 재지정되어 제2차 폭격 사건이 일어났다. 1952 9 15일 오전 11시경, 미 극동사령부 소속의 폭격기가 독도 상공에 나타나 독도를 두 차례 선회한 뒤에 4개의 폭탄을 투하하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당시 독도에는 20여 명의 선원과 해녀들이 조업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후 6·25 전쟁 중에 독도가 미·일 합동 위원회에 의하여 미 공군의 연습 기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 정부는 독도 폭격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한 미국 대사관에 항의하였다. 항의를 받은 미국 대사관은 1952 12월 독도를 폭격 연습 기지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회신해 왔다.

 

한편 일본의 독도 침범이 빈번해지자 국회는 1953 7월 독도를 보전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시키기로 결정했다. 1953 4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가 창설된 데 이어, 1954 1 18일 영토표지를 독도에 설치했다. 이어 8 15일 독도 등대를 점등해 만국에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렸다.

 

독도 경비초소 및 표식 제막식 기념사진

 

우리나라 최초로 독도학술조사사업을 주도한 주인공이 바로 울산출신 민속학자, 석남 송석하 선생이었다. 주권국가를 아직 세우기 전부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그것도 입으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쉽지 않은 대규모 학술조사활동까지 벌였던 것이다.

 

송석하 선생이 이끈 조선산악회의 독도조사대의 활동결과는 대단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의 팻말을 독도의 동쪽 섬인 동도에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광복 이후 최초의 독도조사에서 조사대는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리는 표목을 설치함으로써 조사활동의 주목적인 독도영유권의 확인 작업을 최종적으로 완성하게 된다.

 

조선산악회

 

조사대는 동도에 두 개의 표목을 세웠는데 오른쪽 표목에는 한자로朝鮮 鬱陵島 南面 獨島(조선울릉도 남면 독도)’라고 썼고, ‘왼쪽 표목에는 鬱陵島 獨島 學術調査隊 記念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대 기념)’이라고 썼다이 표목은 독도가 한국령임을 표시한 최초의 시설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7년 설치된 표목은 1953년 일본인들이 불법 상륙해 철거했다. 일본인들은죽도라고 쓴 표목을 다시 설치했고, 이 표목은 1953 10월 한국산악회(전 조선산악회)가 독도를 재차 방문했을 때 철거됐다.

 

조선산악회는 독도를 학술 조사하면서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의 팻말을 독도의 동쪽 섬인 동도의 두 곳에 설치했다. 사진은 조선산악회가 독도에 설치한 영토표목 (1947.8.20.)

 

현재 설치된 표석은 1953년 한국산악회 표석을 본떠 2009년 경상북도가 다시 복원한 것이다. 독도조사대 귀환 이후 울릉도, 독도 조사활동의 결과는 강연회, 전시회, 언론보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