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1월/1월 18일

이승만 평화선 선포

산풀내음 2016. 11. 25. 22:43

19521 18,

이승만 평화선 선포

 

1951 98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연합국 49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상태를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체결됐다. 이 조약은 일본이 미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의미하였다.

 

당시 일본을 점령한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할 수 없도록 했다. ‘맥아더 라인’으로 명명된 이 선은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폐지될 터였다. 발효는 1952 4 28일로 예정되어 있었고 이후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 1 18일 이승만 대통령은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이른바이승만 라인을 관보(국무원 고시 제14)에 실어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승만은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한 것이다.

 

 

그 당시 자국의 바다를 확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몇 개국이 전부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언이 선포되자 일본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 반응과 함께 철폐를 요구하였고, 미국, 영국, 자유중국 등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며 ‘평화선’으로 불렀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어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이를 위반한 328척의 일본 선박과 3,929명의 일본인이 나포되었다.

 

평화선을 넘어 조업한 혐의로 한국 해군의 심문을 받고 있는 일본 어민들

1955 12 1일 부산에서 재부(在釜) 수산단체가 '평화선 사수 어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시위 군중이 들고 있는 플랜카드에는 '백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 '스나다(砂田) 독설(毒舌) ... 분쇄하자' 등의 구호가 쓰여 있다.

 

평화선 선포의 배경은 바로 우리 어업의 절박함이었다. 당시 국내 어선을 모두 더한 총톤수는 10 t. 그나마 대부분이 무동력선이었다. 일본은 총톤수 200 t에다 그 중 상당수가 한국 경찰선보다 빠른 ‘첨단’이었다또한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의 보호가 시급하며, 세계 각국 영해의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가 일고 있음에 대처, 특히맥아더라인의 철폐에 따라 보완책의 하나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평화선이 어업의 보호만을 노린 건 아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것이 절묘했다. 강화조약의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를 넣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선수를 친 것이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며 ‘독도 문제’를 쟁점화했으나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