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일

독일, 폴란드 침공

산풀내음 2016. 12. 13. 14:21

1939 9 1,

독일군 폴란드 침공 (2차 세계대전 발발)

 

1차 세계대전이 남긴 불씨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다시 살아났다. 1933년 독일 총리로 임명된 아돌프 히틀러는 그 해 7월 일당독재 체제의 기틀을 확립하였고, 1934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국민투표를 통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하고 이를 총통이라 하면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이미 히틀러는 1933년부터 독일을 재무장 시켰다. 1936년 베르사유조약을 어기고 라인란트를 점령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원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은 본토 이외에 발트해 연안에 위치 한 단치히 항(현 그다인스크항) 주변지역을 자국 영토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폴란드에 의해 나눠져 있었다. 1939 년 독일정부는 본토와 단치히 지역을 잇는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도로건설을 폴란드에 요구하였고 폴란드는 이를 거부한다.

이에 히틀러는 본격적으로 폴란드 침공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39 4 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했던 독폴 불가침조약과 1935년에 체결한 런던 해군 군수 조약을 모두 파기하였다.

 

이어서 독일은 소련과 1939 8 22일 독소 불가침 조약, 소위 몰로토프-리벤토르프 조약을 체결한다. 독일과 소련은 조약의 비밀의정서를 통해 폴란드 서쪽 1/3은 독일이, 동부지역 2/3는 소련이 접수한다는 합의도 한다. 이를 통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까지 독일은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한편 독일의 확장주의에 위기감을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19393월 30 폴란드에 대해 군사 원조를 보증하고 폴란드 정부의 방침을 지지했다. 나아가 8 25일에는 프랑스-폴란드 사이에서 군사 동맹을 보완하는 것으로 폴란드-영국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당초 독일이 기습 공격으로 잡은 D-Day 8 26일은 연기되게 되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교섭을 통해 폴란드와의 개전 시에도 양국이 군사적 개입을 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확신하자, 히틀러는 8 29일 폴란드에 회랑 할양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고 이를 묵살하자 9 1일 새벽 4 40분 폴란드 침공을 감행한다.


 

 

침략 전날인 8 31일 밤, 나치스 SS대원들은 폴란드 군인으로 가장하고 폴란드 접경지역에 위치한 독일 지방방송국에 난입, 마치 폴란드 군인의 소행인 것처럼 날조하며 폴란드 침공 명분을 세웠다. 암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다. 히틀러는 이 대담한 사기극을 이용, 공개석상에서 `참을 수 없는 도발행위`로 간주, 이를 규탄하며 폴란드를 맹 비난했다.

 

새벽 4 45, 독일 군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의 모든 포문에서 단치히 항구(현재의 그다인스크항)의 동쪽 해안을 향해 일제히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포병부대도 폴란드 국경지대를 향해 일제히 포문을 열었고, 53개 사단 이상의 정예부대도 서부 국경을 넘어섰다. 20세기의 비극, 2차대전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발발과 함께 영국과 프랑스는 즉시 독일에게 철수를 요구하였고 철수의 시한이 종료함과 함께 9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독일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한 지원과 독일에 대한 공세 모두 시늉만 냈을 뿐이었다. 그래서 1940 5월 프랑스 침공으로 실질적 전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기간의 전쟁을 가짜전쟁(Phony War)이라 한다.

 

결국 9 9 일 독일은 바르샤바 시가지를 공격했으며, 9 13 일에 이르러 바르샤바는 독일군에 의해 완전하게 포위되었다. 그리고 9 24 일 독일군은 약 1000 여대의 폭격기를 투입시켜 바르샤바 시가지를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특히 바르샤바 서쪽의 브주라 강 인근에서 9 9일부터 18일까지 치러진 전투(부주라 전투)에서 폴란드는 전쟁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독일에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9 17일 소련이 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통하여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당시 동부지역 끝부분에 몰려 연합군의 원조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소련의 침공은 날벼락과 같았다. 폴란드는 바르샤바 모들린(Modlin) 지역에서 결사항전을 했지만 패배하여 9 29 일 바르샤바의 모든 지역이 점령당했다.

 

이후 폴란드 최 북단 발트해에 인접했던 헬 반도의 수비대가 10 6일 투항함으로써 폴란드 침공 9월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후 폴란드 영토는 독일, 소련이 분할점령하게 되었다.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폴란드 군 63,000여 명이 전사하고 133,700여 명이 부상했다. 또한 660,000여 명이 독일-소련군에 사로잡혔는데, 이 중 420,000여 명은 독일군에게, 240,000여 명은 소련군에게 사로잡혔다. 여기에 대하여 민간인의 희생 또한 엄청났다. 2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직접적인 전쟁의 폭격 등에 의한 것도 있지만 점령지에서의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한 의도적 학살도 상당 부분 이었다. 예를 들어 9 4일 폴란드 남서부의 쳉스토호바(Częstochowa)에서는 독일 제 42보병연대가 폴란드 민간인 1,140명을 학살했으며, 그 중 110명은 유대인이었다. 같은 날 즈워체프(Złoczew)에서는 독일 제 17보병사단이 폴란드인과 유대인 200여 명을 학살했다.


9 1일 최초 폭격 받은 폴란드 도시들 중 하나인 비엘룬.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도시 중심부의 90%가 파괴되었고 1300명의 주민이 생명을 잃었다.



포격 중인 독일 함대



국경을 넘는 독일군



독일 전투기 BF 109



폴란드 보명


폴란드 7TP 경전차. 





폴란드 포로 학살



폴란드인들을 총살하는 독일의 아인자츠그루펜. 아인자츠그루펜은 폴란드에 있던 16개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학살했고, 포즈난에서는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가스실에서 정신병자들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