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9월/9월 1일

리비아, 카디피 쿠데타로 집권

산풀내음 2016. 12. 13. 14:23

1969 9 1,

리비아, 카다피 쿠데타로 집권

 

1969 9 1일 새벽,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카다피(Muammar al Gaddafi, 1942 6월 7 ~ 2011 10월 20)를 중심으로 한 비밀 청년장교단체 ‘자유통일장교단’이 정권을 장악했다. 병 치료를 위해 해외에 체류 중이던 이드리스 1세 국왕 대신에 하산 황태자가 방송을 통해 퇴위를 선언함으로써 18년간의 왕정도 붕괴됐다. 국왕은 즉시 터키로 망명했다.

 

카다피는 곧 혁명위원회를 발족해 비상혁명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의회 의장)과 국가 원수를 모두 겸직했고, 국명을 ‘리비아·아랍공화국’으로 개칭하고 거사 목적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인 통일 달성”임을 분명히 했다.



1969의 중위 시절 카다피(왼쪽)와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카다피의 쿠데타 자체는 우스울 정도로 서투른 것이었다. 카다피는 이집트의 전설적인 여가수 움므 쿨숨(1904~1975)이 리비아의 두 번째 도시인 벵가지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자 쿠데타 실행을 연기했다서툰 부분은 이것뿐 만 아니었다. 한 쿠데타 참여 군인은 자신의 소총과 탄약을 택시에 두고 내렸고, 다른 이는 이유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다른 두 명은 임무 수행을 위해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냈다. 그럼에도 카다피 대위와 그의 동료 11명은 상황을 장악했다. 리비아의 첫 왕이었던 이드리스 1세의 왕정 기반이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비아 내 몇몇 다른 집단도 또 다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낫세르 대통령은 권력을 잡으려는 다른 조직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은 순진한 음모자들이 대신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서방 외교관들과 정보 기관들도 쿠데타 소식에 놀라고 혼란스러워 했다. 당시 리비아 내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부는 무아마르 카다피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다피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쿠데타 발발 13일 지나서 중동의 한 언론이 “27세 카다피 대위가 혁명평의회 의장, 총리, 국방장관, 육군사령관을 겸임한다”고 보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942년 유목인인 베두인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엄격한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952 10살 때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깊게 받아 그의 아랍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이념을 따랐다카다피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존경하였고 따라서 나세르의 범아랍주의에 동조하며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를 합친 연방공화국 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1970년 나세르 사망 후 카다피는 자신이 나세르 후계자라고 하고 다녔다.

 

카다피는 철저한 반서방주의자였다. 우선 1970년에 미국과 영국의 공군기지를 철수와 함께 리비아 거주 유대인 및 이탈리아 정착민 등을 추방시켰다. 그 다음으로 반식민주의를 표방하며 제국주의와 싸우는 어떤 조직에도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들어가 이들을 학살한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 ‘검은 9월단’을 후원했다고 전해지며, 1986년 독일 수도 베를린의 한 디스코텍에서 일어난 폭발로 세 명이 죽고 200명이 다친 사건에도 리비아가 직접 개입해 있다고 미국은 비난했다. 그리고 198812 21일 발생하여 259명의 탑승자 전원을 사망케 한 팬암 항공기 (Pan Am Flight 103) 폭파 사건도 카다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지칭하였고 1982 3월 리비아 석유 수입 금지 등 경제제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팬암 사건 이후 경제제제 조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90년도 내내 리비아는 서방의 경제제제를 감내하며 지내야 했다.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서방 세계에 대해 화해의 손짓을 내보였다. 2003 미국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이라크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유럽과 서방 세계에 개방을 선언하고, 외부의 학술 연구단의 출입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2005 5 15, 미국과 리비아는 국교를 전면 재개했고, 미국은 2006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그러나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리비아에서도 2011 2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20118월 22 자유 리비아군이 트리폴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둘을 생포했다. 10월 20 그는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이로써 그의 42년간의 독재는 막을 내렸다.

 

그는 재임 시절 여러 가지 기행으로 유명하다. 그 첫 번째가 방탄텐트이다. 카다피는 트리폴리에 머무는 기간에는 요새화된 기지에서 생활했지만 해외 여행 시에는 세계 각지의 수도에서 베두인족 텐트를 치고 그곳에서 숙박을 해결했다. 방탄 처리까지 된 것으로 알려진 이 텐트는 너무 무거워 수송을 위해 별도의 비행기가 떠야 할 정도였다. 그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종종 텐트 주변에 낙타 한 두 마리를 매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카다피 옆에는 40명의 정예 보디가드가 늘 따라다녔다. 아마조네스라고 불리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이고 처녀라는 점이다. 이들은 카다피의 수행원으로 선발되면 '순결 맹세'를 했다고 한다.

 

2007년 카다피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을 '달링'이라고 불렀고, 2008년 라이스가 트리폴리를 방문했을 때 미화 20만 달러 상당의 반지와 류트라는 현악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반군에 의해 트리폴리가 함락되고 카다피의 숙소가 공개됐을 때 그곳에서 라이스의 사진집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경찰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를 수사할 당시 한 17세 매춘부의 진술로 인해 카다피의 여성편력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매춘부는 '붕가붕가'로 불리는 베를루스코니의 섹스파티에 초대받았을 때 베를루스코니로부터 자신이 카다피의 행적을 흉내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카다피가 첩들과 벌인 애정행각에서 베를루스코니가 붕가붕가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이다.


 

카다피의 텐트


카다피는 ‘아마조네스’라고 불리는 여자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있고 국제 무대에도 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Libyan leader Muammar al-Gaddaifi(R) meets with Italian Prime Minister Berlusconi (L) in Rome during his visit to Italy on June 10, 2009.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

'역사속에 오늘, 9월 > 9월 1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KAL 007기 소련기에 피격  (0) 2016.12.13
국회의사당 준공  (0) 2016.12.13
독일, 폴란드 침공  (0) 2016.12.13
일본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0) 201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