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1일

일제, 창씨개명제 실시

산풀내음 2016. 12. 14. 22:08

19402 11,

일제, 창씨개명제 실시

 

조선총독부가 1939 11 10일에 공포한 창씨개명제를 1940 2 11일부터 실시했다.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만든 창씨개명제는 조선민족 고유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도입할 목적으로, 모든 조선인은 이날부터 6개월간인 810일 사이에 자신의 `()`를 결정하도록 강제했다.

 

1940 6월경 창씨개명 안내광고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완성편'으로 실시한 조선민족 말살정책 가운데 하나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화하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내걸고 조선인들의 황민화, '일본인화' 정책을 강행했다.


일본식의 ‘씨()’를 만들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는 이 창씨개명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일본의 ‘씨’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호적을 새로 편제할 때 전 국민을 일률적으로 호주를 정점으로 하는 친족집단으로 나눠 통치체제의 기본으로 삼아왔다. 뿌리가 없는 이 친족집단이 ‘가()’였으며, 씨는 가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창씨개명의 목적은 조선의 전통적인 부계혈통 관계를 해체시키고 일본식의 씨단위 국가로 만들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흐려놓으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대다수 조선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창씨개명'을 강제한 보다 실리적 목적은 1942년에 추진된 '징병제' 실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1945 3 6일자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기밀문서에서 그 진의가 확인되고 있다.

 

"...특히 징병제를 실시한 오늘날 황군으로서 조금의 차별도 없이 (조선인 병사와 일본인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군무에 계속 정진할 수 있고, 만일 현재 군대 안에 金모, 李모 등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득과 폐단 또한 저절로 밝혀지게 되고..."

<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내무성 관리국, 1945. 3. 6>

 

이 제도가 실시되자 초창기 조선민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리 속담에 '성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고유 성씨에 대한 조선인들의 집착은 거의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시행 첫 3개월동안 신청자는 전체 인구의 7.6%에 불과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당시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제를 반대하는 엄중한 항의서를 보내고 58세를 일기로 자살했다. 또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8월까지 조선인 전체의 80% 개명을 목표로 3도의 경찰부, 258개의 지방 경찰서, 2943개의 주재소 순사를 동원해 협박을 일삼기 시작했다.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자녀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했고, 교사들에게는 어린이들을 이유없이 구타케 하고 집에 가서 창씨개명을 안해서 맞았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창씨하지 않은 호주는 `비국민`의 낙인을 찍어 사찰을 하고, 노무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했다. 이에 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 인구의 80.5%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홍보한 친일파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공주 갑부 김갑순은 창씨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김정갑순(金井甲淳)'으로 창씨하여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또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1940.1.5), '창씨와 나'(1940.2.20) 등을 실으면서 창씨제도를 적극 홍보하였다.

 

친일성이 농후한, 일본식 이름으로 솔선수범해 창씨개명한 후 창씨개명 선전에 열을 올린 춘원 이광수. 사진은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