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1일

거창양민학살사건

산풀내음 2016. 12. 14. 22:13

19512 11,

거창양민학살사건

 

6·25전쟁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1951년 초반, 국군은 전방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뿐만 아니라 후방의 빨치산으로부터도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을 단일화하기 위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배치된 군부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9연대장 오익균(吳益均)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 소령은 1951 2 10일 민간인들을 안전 지역으로 피난 및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신원면의 과정리, 중유리, 와룡리, 대현리 주민들 800여명을 과정리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 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교실 4개와 복도에 꽉 차 있었다고 한다.


11일 날이 밝자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을 가려내 내보낸 뒤 모두 박산골로 끌고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하고자 했다. 동시에 마을집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박산골에서만 719명이 학살됐다. 학살당한 주민들 대부분이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들 이었고 젖먹이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9연대 3대대는 이런 식으로 빨갱이 대신 무고한 양민들을 연이어 학살하며 이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9연대 본부에 187명의 공비와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시체 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박산으로 이끌려 나가기 직전 선별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살아남은 이들이 뜻을 모아 3월경 당시 거창 지역 국회의원이던 신중목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신중목이 3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를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하면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4 6일 거창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운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겸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인 김종원은 서둘러 학살 현장으로 뛰어가 어린이들의 시체를 2km 떨어진 계곡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합동조사단이 거창 현지에 도착하자 숙소마다 전화를 걸어 "신안면에 수백 명의 공비가 나타났습니다"하며 겁을 주었다다음 날 조사단이 신원면을 향해 산길을 가고 있을 때는 김종원의 지시를 받고 공비로 가장한 병사들이 따발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드는 등 조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에 손상이 가해질까 두려워 4 24일 담화문을 통해 "이 사건은 공비와 협력한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거짓 해명을 했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김종원(왼쪽)과 이승만(오른쪽). 김종원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이후에도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고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이며 장면 부통령 피습 사건의 배후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이승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워싱톤포스트를 비롯한 외국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자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국회의 결의로 이들 범죄자들은 1951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익균, 한동석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하지만 이승만은 얼마 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정말 대단한 개새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