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12일

콩고의 루뭄바 살해

산풀내음 2016. 12. 14. 22:36

19612 12,

콩고의 루뭄바 살해

 

1961 2 12일 콩고의 전수상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Émery Lumumba, 1925 - 1961) 가 피살됐다. 감금 중인 루뭄바를 카탕가로 이송한 자체가 수상했고, 카탕가 지역 주는 탈출한 루뭄바를 살해한 부락민에게 8천불을 지불하였으니 이 사건은 계획적인 살해라는 추측이 떠돌기도 했다. 유엔 조사단은 부락민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카탕가 지역의 주지사 촘베의 앞에서 살해되었다는 보고로 더 한층 루뭄바의 죽음에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촘베는 루뭄바의 죽음이 전적으로 카탕가 내부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협조를 거부했다. 1965년 모부투로부터 '국민 영웅'으로 칭송 받았으나 아직까지도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콩고민주주의 공화국은 벨기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킨샤사 콩고(Kinshasa Congo)를 말한다. 콩고 공화국은 콩고 강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인 브라자가 개척하여 브라자빌 콩고(Brazzaville Congo)라고 불렸다.

 

파트리스 루뭄바는 1925벨기에령 콩고의 도시인 스탠리빌(현재의 키상가니)에서 태어났다. 루뭄바의 모토는 '자유로운 콩고의 자주독립과 통합'이었다. 루뭄바는 조제프 카사부부, 모이스 촘베와 함께 콩고 독립운동을 지휘한다.


1959년이 되자 벨기에에 대한 저항운동이 거세졌다. 어쩔 수 없이 벨기에는 1960 6 30일에 콩고를 독립시켰고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선거에서 루뭄바가 세운 정당이 승리하게 되고 루뭄바는 36세의 나이로 콩고민주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고 카사부부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립의 주역인 세 사람은 벨기에와 투쟁할 때는 협력하였지만 독립하면서 노선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카사부부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인물이었고 루뭄바는 우체국 직원으로 시작하여 노조운동을 통해 단련된 자유주의자였다. 반면 부유한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촘베는 반공주의자이며 기독교도였다.

 

먼저, 내심 총리 자리를 원하고 있던 촘베는 루뭄바가 총리가 된 것에 대한 반발로 1960 7 11일에 카탕카 주의 독립을 선언했다. 카탕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넓고 벨기에의 16배나 된다. 이곳에서는 코발트, 구리, 주석, 라듐,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촘베가 독립을 선언하자 벨기에와 서방은 이를 지지하였다. 게다가 벨기에는 자국민의 보호를 이유로 카탕카 주에 자국군 6,000명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해 루뭄바는 소련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결쿡 콩고는 독립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내전상태로 돌입한 것이었다.

 

콩고는 레오폴드빌의 합법정부, 카사부부와 스텐리빌(Stanleyville)을 중심으로 한 경쟁파, 루뭄바 그리고 카탕카 주의 분리독립파, 촘베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그리고 각 파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얼키고 설켜 콩고내전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출발한 루뭄바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미국이 루뭄바를 반 서방파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60 8월 콩고주재 미중앙정보국 지부에서 ‘콩고가 공산주의자의 전형적인 권력탈취를 경험해가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전문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콩고가 제2의 쿠바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루뭄바를 제거하고 친서방 인물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960 9 5일 콩고 대통령 카사부부가 수상 루뭄바를 해임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의회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카사부부가 해임한 것은 정치적인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하지만 루뭄바는 이에 반발하여 의회의 도움을 받아 카사부부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하는 결의를 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콩고의 군 실권자 조셉 모부투(Joseph Mobutu)가 카사부부와 모종의 협약을 맺고 쿠데타를 일으켜 루뭄바를 체포하면서 해소되었다.

 

루뭄바는 모부투가 쿠데타가 일으키자 즉시 유엔평화유지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유엔의 개입으로 루뭄바의 신변은 잠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루뭄바가 카사부부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였음에도 미국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1960 11 27일 루뭄바는 유엔군의 보호를 이탈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이 있는 스텐리빌로 탈출하려다 모부투의 군대에 체포되었다.

 

  

좌에서 우로 모리스 므폴로, 조셉 오키토, 파트리스 루뭄바. 이들은 이 사진이 찍히고 얼마 후에 살해되었다.

 

모부투에게 체포된 이래 루뭄바는 레오폴드빌에서 150㎞떨어진 사이스빌 의 Camp Hardy의 군막사에 연금된 상태였다. 1961 1 17일 루뭄바는 강제로 그의 협력자인 모리스 므폴로 와 죠셉 오키토 와 함께 비행기에 태워져 카탕카 주의 바꾸왕가로 이송되었다. 루뭄바의 철천지 원수인 촘베의 카탕카 주로 이송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서방은 이 사실에 모두 침묵하였다.

 

1961 2 13일 카탕카 주 정부는 2 12일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이 탈출했지만 적대감을 품은 촌민들의 손에 잡혀 살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유엔은 루뭄바와 동료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빌에 도착한 1 17 21:40에서 21:43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와 동료의 시신은 비밀리에 버려져 지금도 시신의 행방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