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2월/2월 21일

단재 신채호 선생 감옥에서 돌아가시다……

산풀내음 2016. 12. 22. 21:07

19362 21,

단재 신채호 선생 감옥에서 돌아가시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역사(歷史)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1936 2 21일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충청남도 대덕 출생으로, 18세 때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그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했고, 1905 26세의 나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그해에 황성신문에 논설기사로 입사해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 그의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이 되었다.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 선생은 이곳에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 매국행위에 대하여 통렬하게 비판하였으며, 이와 함께 국민의 계몽운동에도 적극 매진하였다. 한편 양기탁·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1907년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했고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을 거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광복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채호 선생은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름으로 중국 북경으로 오게 되었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의원이 됐다. 하지만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하였고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한편 북경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었다. 첫 번째 부인과 별거한 뒤 10년간 독신으로 지내다가 3.1운동 당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설립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여성독립운동가 박자혜 선생을 만나 1920년 북경에서 가정을 꾸미게 되었다.


박자혜 선생은 둘째를 임신했을 때 경제적 어려움으로 국내로 다시 오게 되었고 인사동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신채호 선생은 1923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가담했다박자혜 선생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국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당시도 나석주를 안내하는 등 남편의 의열단 활동을 측면 지원했다.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던 신채호 선생은 1928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 2 21일 옥사 순국하였다.

 

신채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박자혜 선생은 “이제는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남편의 석방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녀에게 남편 신채호 선생의 죽음은 큰 상실이었다. 남편의 죽음 후 첫째 아들 수범은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두범은 그 다음 해 1942년 세상을 떠났다. 박자혜 선생도 1943년 홀로 셋방에 살다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신채호 선생의 동지이자 아내인 박자혜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