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8일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산풀내음 2017. 1. 7. 10:14

1917 3 8,

러시아 2월 혁명 발발

 

1차 대전 발발은 러시아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독일과 개전 1년 만에 15만명이 전사하고 70여만명이 부상한데다, 서부 공업지대의 함락으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이 야기돼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가 반복됐다. 1917년은 파업과 함께 열린 해였지만, 동시에 파업을 마무리한 해이기도 했다.

 

세계여성의 날이기도 한 1917 38(러시아 구력 223),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한 섬유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빵을 달라!”며 파업을 일으켰다. 러시아 ‘2월 혁명의 봉화가 솟아오른 순간이었다. 날이 갈수록 파업 가담자가 늘어나고 시위 지역도 전 도시로 확산됐다. 시위에 합류하는 군인들도 생겨나 위에서 발포명령을 내려도 하늘을 향해 쏠 뿐 진압에는 관심조차 없고 심지어는 장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감옥 문도 열려 2400여명의 정치범이 풀려나는 등 페테르부르크는 혁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결국 반란진압을 포기한 군 장군들의 호소에 짜르(황제) 니콜라이 2세는 황제직을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위했지만, 동생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거부함으로써 303년 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다. 316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족들은 1918년 처형당했다.

 

1911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

 

빈 자리는 임시정부가 차지했지만, 스위스로 망명했던 레닌이 416일 돌아오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레닌의 귀국에는 러시아의 혼란을 기대한 독일의 지원이 있었다.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레닌 앞에는 수많은 붉은 깃발이 펄럭였고 군중들은 프랑스대혁명 노래라 마르세즈를 부르며 그를 환영했다.

 

이튿날 레닌은모든 권력을 소비에트(평의회)라는 구호아래 10개항의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상황도 레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독일군에 가한 임시정부의 무리한 대공세가 참패로 끝나 반전(反戰)을 외치는 레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고, 육군 참모총장의 쿠데타까지 일어나 임시정부의 위상까지 흔들렸다. 보잘것없는 소수파 볼셰비키는 혼란한 틈을 이용해 자체 군대까지 보유한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10월 혁명을 향한 시계추는 점점 빨라졌다.

 


소련의 탄생과 붕괴

http://blog.daum.net/gmania65/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