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9일

카터 미 대통령, 주한미국 철수 계획 발표

산풀내음 2017. 1. 7. 18:59

1977 3 9,

카터 미 대통령, 주한미국 철수 계획 발표

 

1976 11 3일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지미 카터(James Earl "Jimmy" Carter, Jr., 1924 10월 1 ~ )가 당선되었다. 미 대선은 외적으로는 베트남전쟁 패배와 국가재정 악화, 내적으로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 후유증으로 진실성과 도덕성이 이슈로 등장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카터는 도덕성 회복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며 현직 대통령으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제럴드 포드에게 미세한 차이로 승리했다. 카터는 또 ‘인권 외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Inauguration of Jimmy Carter

 

박정희 정부는 워싱턴 정가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던 카터의 당선 가능성을 낮게 봤다. 설사 당선된다 해도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는 현실이 됐다. 카터는 1977 1 26일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국가안보회의 내 정책검토위원회에 주한미군 병력 삭감 문제를 3 7일까지 검토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3 9일 카터 대통령은 박동진 외무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선거 당시 내세운 단계별 주한미군 철수 공약은 불변임을 강조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기간은 4-5년이 적절하며, 철수일정은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마련할 것이며, 철수는 또 일본의 완전한 이해와 참여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외에 한국정부가 북한의 어떠한 침략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상군을 갖도록 한국의 전력증강계획을 적극 지원할 것이며, 한국의 공중방위를 위해 상당기간 미공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발표된 철수 계획에 따르면, 1978년 말까지 지상군 6000명 철수에서 이 후 1979년 말까지 6000명 철수(1978년 말까지 지상군 3400명 철수하고 1979년 말까지 지상군 2600명 추가 철수)로 변경되었으며, 1980년 여름까지 지상군 9000명 추가 철수하고 1982 7월까지 나머지 지상군 모두 철수. 단 공군과 해군은 계속 주둔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의 완강한 반발과 더불어 미 의회와 미 국방부 역시 크게 반대하여 제동을 걸었으며, 1979 6월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철군안이 완전히 백지화 되었다.

 

1979 6월 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모습.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환영 인파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1979 6월 말 퍼스트레이디 대행이던 박근혜 대통령이 방한한 카터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로잘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1979 6월 방한했을 때 주한미군 장병들과 함께 왕복 5km 조깅을 하고 있는 모습.

1979 7 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박근혜(현 대통령)가 한국을 떠나는 카터 대통령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왼쪽 둘째는 딸 에이미. 박 대통령은 23일 일정으로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공박을 벌였다.

 

카터가 이토록 강경하게 주한미군 철수를 밀어부친 것에 대해 당시 한국 내의 인권 상황 등과 연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당시 한국은 긴급조치 9호 하에 민주주의가 심하게 억압받는 사회였고 미국 의회와 언론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1976 9 15일에는 멕거번 상원의원이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는 사기극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북의 위협을 국내 정치 억압에 이용하고 개인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 주력해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또한 10 25일에는 소위 코리아 게이트라는 것이 터진다. 이 날 워싱턴포스트지에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정보부 기관원들이 미 의회 의원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원들에게 매년 50만∼100만 달러를 뇌물로 주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배후에는 한국의 박 대통령이 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여기에 더하여 11 24일에는 미국 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주미대사관 참사관)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였는데 그는 미국 내 한국 정보부원 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미 정부에 공개했다이 일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박동성 사건, 소위 Koreagate

 

1977년 들어 김형욱 사건까지 발생한다. 1973년에 미국으로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1977 6 22일 미 하원 청문회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지시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폭로했고 이는 당시 박정희에 대한 미국 내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1977년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