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6일

독일. 베르사이유조약 파기 선언

산풀내음 2017. 1. 14. 08:49

19353 16,

독일. 베르사이유조약 파기 선언

 

1935 3 16일 독일의 수상겸 대통령인 아돌프 히틀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베르사유조약의 파기와 대규모 재군비를 선언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9 6.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패전국 독일은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440개조로 이뤄진 이 조약에서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돌려줘야 했다. 전쟁 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10년 안에 지불하고, 공군과 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으며, 육·해군 병력을 10만 명 이내로 제한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1923년 독일이 배상금을 제때 지불하지 않자 프랑스, 벨기에 연합군 6만 명이 독일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파업으로 점령군에 맞섰고, 프랑스는 2년여 만에 루르에서 물러났다. 사실 이 사건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재무장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프랑스는 불안했다. 독일이 다시 부활한다면 프랑스를 침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확보한 알자스 로렌지방과 서부 접경지역의 국경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라인란트 지역을 영구히 비무장화 시켜 독일이 아예 전쟁을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1925 10 16일 체결된 것이 로카르노 조약(Locarno Pact)이다. 이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대표가 스위스로카르노에서 체결한 일련의 국지적 안전보장조약이었다. 내용 중 중요한 것은 독일, 벨기에, 프랑스 상호간에 불가침 및 라인란트 영구 비무장화였다.

 

이후 벌어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은 경제의 파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혼란은 히틀러에게는 기회였다. 당시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1933년 총리에 취임한 히틀러는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시켰고 마침내 1935 3 16일 베르사이유조약 파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태 발전은 군사적 힘의 우위에 도취한 전승국들이 국제 외교의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에 바빠 패전국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무리한 의무를 강요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독일의 재무장

 

독일정부가 이날 징병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나치의 통제하에 있던 독일 언론은베르사유는 끝나고, 독일은 다시 자유를 갖게 되었다.’ ‘독일국민들은 오로지 독일군대의 재탄생에 의해서만 군사화되어 가고 있는 유럽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로 나치정책을 뒷받침했다.

 

히틀러가 재군비 선언을 한 지 한 달 만인 1935 4 11일 이탈리아의 소도시 스트레사(Stresa)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모여 삼국회의를 가진다. 이른바 ‘스트레사 전선’이라 불리는 삼국의 ‘대독(對獨)합의’였다. 이들은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에 대해 의례적인 항의를 했고, 로카르노 조약의 준수를 외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떠한 구속력 있는 행동이 없었던, 구호에 그쳤던 모임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이때부터 각자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