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 오늘, 3월/3월 16일

미군, 베트남 미라이 주민 대학살(My Lai Massacre)

산풀내음 2017. 1. 14. 09:00

19683 16,

미군, 베트남 미라이 주민 대학살(My Lai Massacre)

 

1968 3 16일 아침. 미 제11보병여단 소속 찰리 중대원 60~70명이 9대의 헬리콥터로 베트남 쾅가이성 미라이 마을에 착륙했을 때, 주민들은 여느 때처럼 아침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소대장 캘리(William Calley, 1943 - ) 중위는 어린이 노인 부녀자뿐인 주민을 한곳에 모았다. 중대원들은 최근 4개월 동안 병력의 3분의 1이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살해되거나 부상한 터여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소대장 캘리(William Calley) 중위

 

병사들의 눈빛을 본 주민이! !”하며 애원했지만 이미 병사들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가 있었다. 이윽고 병사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고, 주민들은 피를 흘리며 곳곳에 쓰러졌다. 4시간에 걸친 광란의 학살극이었다. 헬리콥터 조종사가 이 사실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나서야 학살은 중단됐지만 이미 500명 이상의 주민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뒤였다. 상급부대는민간인 20명이 우발적으로 희생된, 성공적인 작전으로 사건을 은폐했다.

 




1969. 12. 5 LIFE지에 실린 미라이 학살 기사 (두 번째 page 사진은 어린이를 포함한 베트남 미라이 마을의 선량한 주민들이 사살되기 전 공포에 띤 채로 모여있다.)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듬해 3월 학살 현장에 있던 병사에게서 이 사실을 전해들은 한 제대군인이 워싱턴에 편지를 보냈고, 이 사실을 눈치챈 세이무어 허시(Seymour Hersh) 기자가 11 17일자 뉴욕 타임스에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였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더 타임즈(The TIMES) 등 총 36개의 언론사가 앞다퉈 허쉬의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당국의 해명에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들의 여론은 악화돼 결국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됐다. 허쉬는 이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세이모어 허쉬 기자

 

사건의 진상이 의회와 국방부 조사에 의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으나 기소된 14명 가운데 캘리 중위만 재판에 회부됐다. 캘리는 군법회의에서 부녀자와 노인 등 22명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 노동형 선고를 받았으나 복역 사흘째 날 닉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풀려났다. 미국인은 닉슨의 조치를 찬성했다. ‘캘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캘리 혼자서 죄를 뒤집어쓴 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지만 미국인들의 잔인함과 오만함을 잘 보여주는 조치와 국민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반드시 아비 지옥에서 선량한 주민을 살해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